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해밀 Mar 31. 2023

이별하지 못한 청춘




볼 일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낮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있어 자리에 앉았다. 다음 역에 도착하자 내가 앉은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출입문으로 몸집이 있는 중년 아낙이 손수레를 끌고 탔다. 조금 전까지 한두 개 있던 빈자리는 이미 다 차서 그 아주머니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이는 60대 중반으로 나와 그다지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살이 쪄서 무릎이 안 좋은지 걷는 것이 둔해 보였다. 출입문 근처에 앉은 그 누구도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거리는 있었지만 나라도 자리를 비켜줘야 될 것 같아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며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출입문 주변을 서성이더니 거리가 더 먼 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 andriklangfield, 출처 Unsplash




백수가 되고 나서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낮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다 보면 가끔 앉아서 가는 호사를 누린다. 그럴 때마다 연세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보이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진다. 거리가 가까우면 앉으시라고 권해 드리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만큼 붐비는 버스 안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쉽지 않아 괜히 마음만 좌불안석이다.

황당한 일은 아줌마 퍼머를 한 중년 여성을 보면 자꾸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엉덩이가 들썩거린다는 것이다. 나와 나이가 별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연령대인 것 같은데도, 오랜만에 버스를 탄 백수는 수 십 년을 거슬러 아직도 내가 버스를 타던 10대, 20대인 줄 착각하는 것 같다.




              © sarahdorweiler, 출처 Unsplash




어느새 나도 백발이 성성하고, 잔주름이 하나, 둘 찾아와 내 나이를 잊지 않게 알려주는데, 검은 염색약으로 백발을 칠하고,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고 나이가 줄어들 리 만무한데 깜빡깜빡하는 내 기억력은 자꾸 그것을 잊어버린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나, 퇴근하던 버스에 앉아 피곤에 못 이겨 졸다가 고개가 부러져라 방아를 찧곤 했다. 놀래서 정신을 차려 보면 옆에 연세가 있는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무거운 눈꺼풀에 눌려 이내 잠에 떨어지곤 했다. 순간순간 정신이 들 때마다 불쑥불쑥 들었던 그 불편함이 육십을 넘긴 지금도 갓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펄떡펄떡거린다.  





© sarandywestfall_photo, 출처 Unsplash




까맣게 칠해진 흰머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면 어쩌면 나도 지하철의 그 아낙처럼 자리를 양보해야 할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이를 떠나, 내가 더 튼튼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쯤이야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훌쩍 늙었다는 사실을 치매환자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직도 팔팔한 청춘에 머물러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다.


불편한 자리에서 여전히 엉덩이가 들썩일 때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청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 시절에 미련이 남아서인지 덜 익은 밥알을 씹은 것처럼 입안이 뜨끔뜨끔해진다. 가슴이 자꾸 뜨끔뜨끔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쓸모 있는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