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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an 22. 2024

밥솥의 세월




전기 압력 밥솥을 바꾸었다. 오랫동안 써온 밥솥은 힘이 달리는지 입을 꼭 다물지 못하고 취사하는 내내 옆구리로 가뿐 숨을  하얗게 뿜어냈다. 밥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밥알이 날아갈 것 같았다. 패킹을 바꾸고도 한동안 잘 썼는데 괜찮다, 말다 하기를 반복하길래 이제는 수명이 다 한 듯하여 꽤 많은 돈을 들여 좋다는 걸로 샀다.

그동안 풀풀 날리는 밥을 먹어서 배송 오자마자 얼른 씻어서 밥을 안치려고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같은 6 인용인데 작아도 너무 작아서 마치 소꿉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조금씩 돌기 시작한 입맛이 갑자기 눈치가 보여 흠칫 배를 집어넣었다.




© pillepriske, 출처 Unsplash





밥솥을 몇 년 사용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꽤 오래 썼던 것 같다. 그 세월 동안 내솥의 크기는 확연한 차이가 날 만큼 많이 작아졌다. 사람들의 밥 양이 줄어서 인지, 밥 대신 외식이나 배달이 늘어서 이런저런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6 인용의 기준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실 그전에 사용한 것은 6 인용이라 해도 꽤 넉넉했다. 그래서 '이게 6 인용이야?'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작아서 또 '이게 6 인용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 markuswinkler, 출처 Unsplash




밥솥 뚜껑을 여는 순간, 나도 몰래 훕!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배를 줄인 것은 어떻게든 시대에 맞추어보려고 습관적으로 드는 무의식의 몸부림이었을까? 그나마 조금 먹던 양도 더 줄여야 하나? 내돈내산 한 밥솥을 앞에 두고 갑자기 훅 들어오는 무언의 압박이 오랜 세월 적응하고, 맞추며 사느라 든 내 버릇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작아진 내솥만큼 쌀도 조금만 씻어서 밥을 안쳤다. 이리저리 메뉴 버튼을 누르는데 안내하는 아가씨(?)는 예전의 그 아가씨다. 늙지도 않았는지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 Michał Głodzik, 출처 OGQ




내솥 사이즈가 한껏 줄어들도록 변하는 동안, 안내 방송하는 아가씨 음성은 여전히 카랑카랑한데 나만 훌쩍 늙은 것 같다. 그조차 조금만 먹으라고 타박하는 것 같은 이 시대의 야박(?)한 밥 인심이 못내 섭섭하다. 무심한 세월은 밥솥에도 어느새 훌쩍 나를 비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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