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사파의 얼굴

사파를 걸으며

by 파란 해밀


2019. 05. 06. 베트남 사파




사파의 초록에 반해 올해 두 번째로 베트남을 찾았다. 하노이에 도착해서 미리 예약한 여행사에 가방을 맡겨놓고 사파행 리무진 출발 시각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두 번째 방문이라고 낯이 익다. 1월에 오빠와 하노이 여행을 다녀 가고 넉 달만에 다시 찾으니 반갑기도 하다.

1월에는 가이드처럼 오빠를 모시고(?) 다니기에 급급해서인지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더니 여행도 직업이 되면 더 이상 여행이 아닐 것 같다. 혼자 다시 오니 역시 여행은 혼행이 꿀맛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홀가분함에 어깨가 들썩거린다.



길거리에 앉아서 음식 먹는 걸 꺼리는 오빠가 없으니 가까이 있는 쌀국수 가게 앞 노변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느긋하게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웠을 즈음 사파로 함께 출발할 다른 여행객들이 거의 다 모인 것 같다. 이용할 차량은 좌우에 한 사람씩 앉는 넓은 리무진이라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빠져나가더니 6시간가량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어느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저녁 먹을 시간을 준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다시 출발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자동차는 차츰 안갯속으로 들어갔다. 짙게 깔린 안개를 헤치고 구불구불한 밤길을 속도도 줄이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달린다.


운전기사 바로 뒷좌석이라 자리에 앉아 온몸으로 같이 운전을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낀 산길을 달리는데 뒤에 앉아 발끝에 얼마나 힘을 주며 갔는지 모른다. 거의 침대처럼 젖혀지는 좌석을 불안해서 써보지도 못하고 3등 칸처럼 바짝 세워서 말똥거리는 뜬 눈으로 지켜보다가 밤늦게 사파에 도착했다.



사파는 떠오르는 여행지답게 메인 광장 근처는 온통 도로가 파헤쳐지고 시내 곳곳은 하루 온종일 뚝딱거리며 공사 중이다. 사파로 오던 중에 예약한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공사로 인해 숙소까지 걸어오기 힘드니까 원하면 무료로 환불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기에 그럴까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히 그럴만했다. 사파에는 택시도 없고, 밤늦은 시각에는 오토바이도 운행을 하지 않으니 하마터면 숙소를 찾아가느라 야간 행군을 할 뻔했다.

부랴부랴 리무진 안에서 메인 광장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를 잡았는데 신의 한 수였다. 뚝딱거리는 공사 소음은 있지만 낮에는 숙소를 나와 있으니 방해받을 일이 없고, 저녁에는 공사가 멈추어서 수면 방해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모든 투어 집결지가 광장에서 시작되니 여러 면에서 이용하기 그저 그만이다.



사파를 찾는 사람들에게 숙소 위치를 고민한다면 메인 광장 근처를 추천하고 싶다. 나 역시 약간 오르막에 전망 좋은 곳을 잡았었는데 사파는 안개가 많이 끼어 그런 곳에 숙소를 잡아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전망은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한다.

트래킹 일정을 마치고 남은 이틀은 수영이나 하면서 호캉스를 하려고 일부러 5성급 호텔을 잡았는데 안개로 주위 경관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안개에 갇혀 있었다. 더우기 호텔과 시내를 오르내리느라 오히려 불편했던 것을 생각하면 메인 광장 근처의 숙소가 내게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박하 시장 투어에서 만난 베트남 아가씨 마리스와 함께 사파 트래킹을 나섰다. 집결지에서 차를 타고 트래킹을 시작하는 곳에서 내렸다. 메인 광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흙냄새, 풀 냄새가 물씬 난다.


드넓은 초록을 기대했는데 사파는 이제 겨우 모내기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직은 벌거벗은 논이 더 많다. 모가 어느 정도 자란 7, 8월이나 황금 들판인 가을이 절정이라고 한다.


트래킹 투어가 시작하는 지점부터 가이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베트남 흐멍족으로 앳되 보이는 20대 중반의 아이 둘을 둔 엄마다. 야무진 입매에 어린 나이임에도 가이드를 많이 했는지 진행 솜씨가 좋다.


따라가는 길은 굽이굽이 논밭을 돌아 마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미로를 따라 모내기를 준비하는 사파는 다시 땅에다 물을 대며 땅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출발 지점부터 가이드와 비슷한 옷을 입고 우리와 함께 걷는 아낙들이 있다. 우리를 따라오는 건지, 우연히 우리와 길이 겹친 건지 초반에는 사파의 자연경관에 취해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쉬면 그들도 쉬고, 우리가 출발하면 그들도 다시 걷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은 점점 더 따가운데 그들은 다들 커다란 바구니를 매고 있다. 우리가 쉬자 고산족 여인들도 산비탈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고 있다.



맨몸으로 탈래탈래 걸어도 힘든 길을 어떤 아낙은 아이까지 업고 길을 나섰다. 가끔 내가 미끄러운 길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는 어느새 쫓아와 손을 잡아주곤 한다. 왜 그러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한참 뒤 목적지에 다다르고서야 알았다.

그들이 보여준 보퉁이에는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수제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왜 저들이 굳이 힘들게 우리를 따라오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의 생업이었다.



꼬불꼬불 비탈진 산길에는 간간히 아이들이 보이고, 아무렇게 난 그 산 길은 아이들의 미끄럼틀이 되어준다. 어느새 어디서 한바탕 놀고 내려오는지 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다.


굽이굽이 걷다 보니 개울도 나온다. 물이 더럽고 깨끗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 꼬마 녀석들이 얕은 개울물에서 놀고 있다. 더운 날에 둘도 없는 놀이터다. 저기서 무엇을 찾는지 궁금해서 한참 동안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았는데 잘 찾아지지 않는지 내가 자리를 뜰 때까지 아이는 등을 한 번도 펴지 않는다.



사방으로 탁 트인 사파는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뻥 뚫린다. 폴짝 뛰면 하늘에 머리가 닿을 것 같은 가당찮은 용기도 생긴다. 아름다운 풍광이 주는 활력일 것이다. 그 날의 분위기를 싸구려 폰으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저 오래오래 기억이나 해야겠다.



우리를 따라온 고산족 아낙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21살 쇼우,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짙은 화장에도 숨기지 못하는 기미처럼, 그녀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도 앳된 수줍음을 가리지 못한다.

같이 간 마리스를 통해 다음 날 오늘 투어 가격으로 깟깟 빌리지를 함께 가줄 것을 제안했다. 영어를 못해 충분한 설명을 해줄 수가 없다고 그녀는 난색을 표했지만 설명은 필요 없으니 길 안내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쑥스러워하며 내 청을 받아들였다.




트래킹 중간에 가이드가 안내하는 어느 집에 들러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으로 알고 오기에는 대로에서 안으로 한참 들어오는 곳이라 지나면서는 오지 못할 곳이다. 아마도 가이드들과 알고 미리 정해놓고 식사를 제공하는 곳인 것 같다. 점심은 그냥저냥 평범했는데 집 앞에 펼쳐진 풍경이 더 없는 선물이다.

다들 그 풍경에 취해 한동안 눈호강을 했다. 입구에 있는 허술한 바지랑대에는 빼곡히 널어놓은 빨래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순둥순둥 잘도 마른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한참을 가다 보니 물을 댄 논 한가운데서 있는 아낙이 눈에 띈다. 한 곡괭이, 두 호미질에 파이고 다듬어졌을 다랑이 논 한가운데서 젊은 아낙이 푸른 하늘을 등짐처럼 짊어지고 논일을 하고 있다.



소도 더운지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풀을 뜯고 있다. 암만 둘러봐도 소가 쉴 그늘 한 뼘이 없다.



걷는 길이 험하거나 가파르지 않아 오랫동안 걸어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은데 장시간 뜨거운 봄빛이 사람을 달군다. 가는 길에 보이는 허름한 움막 앞에 그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작은 그늘이 있다. 덥기는 매한가지인지 다들 뙤약볕 아래 걷느라 벌겋게 익은 얼굴을 식힌다.



구불구불, 꼬불꼬불, 하나 같이 제대로 직선으로 뻗은 반듯한 자리가 없다. 작은 농기계라도 들어가기는 하는 건지....... 한 사람 정도 쪼그리고 앉으면 될 좁다란 논이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돌아보면 전부 다 저런 다랑논들인데 언제 다 물을 들이고 모를 심을지...... 바라보고 있자니 내 허리가 아픈 것 같다.



처음에는 생소한 풍경이라 마냥 들떠서 좋아라 했는데 사파는 다른 관광지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기에는 자꾸 손가시 같은 게 걸린다.


내가 걸었던 길에는 그곳 사람들의 생활이 그대로 널려 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다 가리키지 못하는 넓은 논은 소작을 하는 농부의 일터이고 그들은 적은 쌀이나 품을 받는다고 한다.


내가 소풍 가듯 가볍게 걸었던 길이 그들은 하루 종일 논에 발을 담그고 있던 흙투성이 맨발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고단한 길이었을 것이다. 소작하는 가난한 농부의 등이 굽기 전에 그의 집 가까이 있는 알토란 같은 논 한 계단, 두 계단이 농부의 몫으로 쌓이기를 바라며 돌아 나올 때, 뜨거웠던 햇빛도 슬그머니 누그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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