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03. 깟깟 빌리지를 다시 찾아서
다음 날 깟깟 마을을 혼자 다시 찾았다. 바틱을 하는 할머니를 보기 위해서다. 깟깟이 아니더라도 사파 시내나 다른 마을을 트래킹 하다 보면 심심찮게 바틱 제품을 볼 수 있지만, 완성된 제품보다는 만드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지난 3월 페낭에 갔을 때 처음으로 바틱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들른 페낭의 한 갤러리에서 바틱으로 그린 그림에 반해 한동안 그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표현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곳에 눌러앉아 바틱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이젠 눈이 따라주지 않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아 갤러리 관장에게 배울 수 있는 곳이나 강사에 대해 물어보았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관장은 돈 안 되는 손님의 물음에도 한껏 친절하게 답을 주셨다.
그래도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안 돼' 하며 소 몰듯 나를 몰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바틱을 이곳 사파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엄청 반가웠다. 그때 다 풀지 못한 아쉬움을 오늘은 실컷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나섰다.
이곳에서는 삼실을 감는 것부터 바틱을 그려가는 과정까지 볼 수 있어서 나한테는 그저 그만이다. 이상한 기구가 놓여 있는 가게가 있어 무엇을 하는 물건인가 싶어 주인도 없는 가게를 한동안 들여다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때마침 가게 주인이 돌아와 작업을 하는데 타래로 되어 있는 삼실을 실패에 감는 일이다.
한꺼번에 다섯 타래를 제 각각 다른 실패에 감는다. 팔과 다리를 이용해서 마치 춤을 추듯 감는데 넋을 잃고 보게 된다. 팔과 다리를 따로 놀리면서도 통일된 하나의 동작을 하듯 한다.
사람의 신체를 저렇게 요긴하게 산업용(?)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주머니는 다섯 줄의 실을 마치 한 줄인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실을 감는다. 기계만 없으면 거의 춤사위 같은 동작이다.
기계라고 하기에는 참 보잘것없고 단순한 것이지만 그래도 한꺼번에 5인분의 일을 하고 있으니 업무 효율을 가져다준 산업혁명(?)의 사촌쯤 되겠다.
페낭에서 보았던 바틱에 비해 베트남의 바틱은 도안이나 색상이 한정적인 것이 많이 아쉽다. 물론 페낭 갤러리 바틱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이긴 하나, 대중적인 상품이라 해도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한 염색을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페루의 염색은 얼마나 뛰어난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가치가 새삼스럽다. 천연 염색이지만 선명하면서도 다양한 색으로 만들어 낸 화려한 색감이 페루를 연상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바틱을 하신 지 30년이 되었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어제 쇼우와 함께 간 걸 기억을 하시는지 반갑게 맞아주신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도안을 그리고 한 달에 우리 돈 5천 원 정도를 번다. 일일이 손으로 하는 수고로움에 대한 대가가 참으로 어이없다.
파라핀 덩어리를 화롯불에 녹여 그 물로 밑그림을 그린다. 그것을 염색하면 파라핀으로 그린 부분에는 염색이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무늬가 된다. 얼핏 보면 기계로 프린트한 것 같은 천들의 그림들이 모두 사람 손으로 한 줄, 두 줄 그린 수제품이다.
불이 꺼지고 없을 것 같은 화로에는 촛물을 녹일 만큼의 온기가 근근이 남아 있다.
30년 바틱 세월이 할머니 손톱 밑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처음 기초단계의 그림은 그저 일직선으로 죽죽 그어 나가는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다. 할머니의 손을 눈으로 좇으며 재미있게 쳐다보고 있으니 한 번 그려보라고 연습용 천을 내어주신다.
할머니처럼 나도 잘 그릴 줄 알았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막상 해보니 선이 바르지 않고 삐뚤빼뚤하다. 수 십 년 세월을 단숨을 훔쳐 먹으려는 내 심보가 고약했던 것이다.
나의 참패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자 이번에는 완성된 모티브 한 장을 보여주신다. 다음 공정인 염색을 하기 전이다. 빼곡히 메운 천에는 할머니가 종일 매달려 그린 노고가 그대로 담겨 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또 그리고 수 십, 수 백장을 그렸을 텐데 그 대가가 겨우 5천 원이라고 하니 화가 난다. 베트남의 화폐 가치를 고려해도 할머니 수고에 대한 값이 너무 터무니가 없다.
손으로 한 롤의 삼베를 짜기까지 2달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만들어진 삼베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 스카프나 테이블 웨어로 만들어진다.
손쉽게 사가는 누군가에게는 예쁘네, 안 예쁘네, 비싸네, 안 비싸네를 운운하며 한낮 상품에 불과하겠지만 꼬박 2달을 걸려 겨우 한 롤을 만들어 내는 사람 앞에서는 할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색이 다양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생각마저도 미안해진다.
삼베 짜던 아가씨가 끝단의 술을 풀어 스카프를 완성하고 있다. 온종일 베를 짜거나 짬이 있으면 저렇게 술을 만든다. 시간이 모여서 천이 되고 돈이 되어 그런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저 아가씨가 쉬는 걸 보지 못했다.
쇼핑몰에서 구입한 제품
곱게 만들어진 제품은 잘 포장되어 그럴싸한 쇼핑몰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 포장지의 위력을 빼더라도 확실히 완성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깟깟 마을에서 구입한 제품
그래도 한 땀, 한 땀 손으로 직접 그리고 만든 그들의 수고로움은 그것이 쇼핑몰에서 팔리건, 길바닥 난전에서 팔리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집에서 바꿔가며 쿠션 커버로 사용하고 있다. 바늘이 지나간 수를 놓은 자리, 패턴을 그린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깟깟 마을 어느 아낙의 몇 날 며칠에 걸친 노고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