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 3 때 간간이 일기를 끄적거리면서부터다. 그때는 글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사춘기 때 느끼는 생각의 일렁임을 쏟아내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게 어쭙잖게 시작한 것이 한 장, 두 장 일기장을 채우고 나면 속이 비워지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단지 내 속 털어내자고 시작한 글이지만 하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다. 좀 더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표현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것은 범접하지 못하는 대단한 사람들의 영역으로 선을 그어야 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일기를 쓴 공이었을까? 학창 시절 친구들의 러브레터 대필을 시작으로 주위 사람들은 내게 길고 짧은 글들을 부탁해왔다. 남편의 감형을 바라는 탄원서, 청첩장 문구, 하객 인사말, 퇴임사, 감사패 문구, 개업 인사, 아버지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에게 보내는 편지, 정년퇴직 영상, 팔순 잔치 영상에 띄우는 글...... 다들 평이하고 틀에 박힌 내용은 싫다며 몇 줄의 짧은 글에 진한 감동을 듬뿍 넣은 고객 맞춤형(?) 문구를 국수 뽑듯 막무가내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부탁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상황이지만 나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은 에둘러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그들에게 에둘러 한 거절은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가지 단어만 입력하면 단숨에 그 결과를 추출해 내는 성능 좋은 검색엔진처럼 글도 그렇게 써지는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써보지도 않아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야 했다. 길을 가다가도, 차 안에서도, 자려고 누워서도, 틈만 나면 적당한 문구를 만들기 위해 나는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정작 내 일은 하지도 못하고 머릿속에 빚쟁이처럼 들어있는 부탁은 나를 옥죄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누군가 글을 쓰는 것은 아이를 낳는 산고와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드니 제법 강단도 세어졌다. 거절을 대놓고 했다. 그제야 미처 몰랐다, 미안하다는 것이다. 얘기만 하면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어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접하고서야 어느 정도 주변 정리가 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은 글로 인한 스트레스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상을 당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의금에 대한 인사차 했으려니 하고 받았는데 뜻하지 않은 부탁을 한다. 이번에 돌아가신 장모님과 예전에 돌아가신 장인어른 합장을 한 묘에 적을 문구를 생각해 봐 달라는 것이다. 끝을 모르는 이 다양한 청탁의 장르는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더구나 나는 내 부모 묘도 없다. 어머니는 죽어서 그 좁은 땅에 묻혀 있기 싫다 시며 미리 마련해둔 묘지가 있었지만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이 화장을 해서 외할머니 산소에 뿌려달라고 하셨다. 49재 때 읽어 드렸던 마지막 편지와 함께 어머니를 내 가슴에 묻었다. 그립다고 볼 수도 없고, 찾아가 풀이라도 뽑으며 대신할 곳도 없다.
그런데 정작 남의 부모 묘비를 생각하니 자꾸 내 부모한테 송구해진다. 어머니가 그렇게 얘기하셨어도 그냥 산소에 모셨어야 하지 않았나? 그래도 한 세상 살다 가신 이곳에 돌비석 하나 세워놓고 흔적이라도 남겼어야 되지 않나? 하고 새삼 마음이 어지럽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원하신 대로 하는 게 맞을 거라 생각한 데는 나 역시 그렇게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살면서 남을 재조차 없도록 다 태우고 내 어머니처럼 아무 미련 없이 그렇게 훨훨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으리라 여겨진다.
나의 죽음을 앞두고 내 가슴에 새길 묘비처럼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 떠나는 길을 앞두고 이 생에 와서 나는 어땠는지, 어느 날 갑자기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훌쩍 가더라도 모질게 품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내 삶과 죽음을 더듬어본다. 그 말은 자식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건네는 그냥 빙긋 웃고 마는 엷은 미소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