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켜 세운 아이

by 파란 해밀



2021. 01. 25.


작은 녀석이 네댓 살쯤인 것 같다. 둘째는 첫째에 비해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뭔가 심사가 뒤틀리면 벌써부터 미간에 쌍심지가 켜져 있다. 그러다 보니 무던한 첫째보다 조금 더 살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옛날처럼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닌데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아들 둘이 있는 집에는 둘 중 하나가 딸 같은 아들이라 했던가?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던 큰언니는 그래도 뭐라 뭐라고 쫑알대는 작은 녀석이 더 살갑고 정이 간다고 했다.



"이모, 아야 해?"
"이모도 먹어"
"아우! 힘들어. 아우! 힘들어"

하며 살뜰히 이모를 챙기는가 하면, 늘 다니던 길을 잘 가다가도 꾀가 나면 힘든 척 쪼그리고 앉아 이모의 등을 노리는 묘수를 꾀하기도 했다. 깜찍한 꼼수를 모르는 척하고 등을 내어 주면 녀석은 잽싸게 업혀 작은 엉덩이를 들썩거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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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이 커가고, 말도 늘고, 생각도 자라는 반면, 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응할 수 없는 피곤에 몇 년 동안 속수무책이었다.

몸에 좋다는 한약부터 갖은 보양식도 소용이 없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병원을 다 다녔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허무한 결과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차라리 어디가 아프다는 명확한 진단이 나오면 치료를 해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품어보겠지만 그럴 수조차 없다는 것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오뉴월의 얼음처럼 몸은 물이 되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에너지를 다 소진했다. 책상에 앉아 있을 힘도 없고, 맥없이 걷는 내 모습을 보고 발이 땅에 닿긴 하냐고 직원들이 묻곤 했다. 바닥에 누우면 그대로 산송장이 되었고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갔으면......., 그냥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새벽녘에 물이 먹고 싶다는 큰 녀석에게 그 갈증을 알면서도 일어나 물을 떠 줄 힘이 없어 그냥 자라고 했다. 이불을 차내고 자는 아이에게 손을 뻗어 그 이불을 덮어줄 힘이 없어 옆에 누운 채 뻔히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숨 쉬는 송장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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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네 식구가 걸어서 집으로 왔다. 집 가까이 왔을 때 그동안 조용히 있던 작은 녀석이 한 마디 했다.


"엄마, 달이 자꾸 나를 따라와"

그 말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머리맡에 둥그런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식당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아마도 녀석은 그 달을 주시하면서 오느라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가게에서부터 보았던 달이 제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와 집에 도착했는데도 거기에 또 달이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달이 무훈이를 좋아하나 보네. 그러니까 자꾸 따라왔지"

대답 대신 녀석은 작은 콧구멍을 벌렁 했다. 애나 어른이나 저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정작 짜릿한 전율을 느낀 사람은 녀석이 아니라 나였다. 달이 나를 따라온다는 녀석의 말이 내 온몸 구석구석 모세혈관까지 꿈틀거리게 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떨리는 말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언어인가?


그날이 그날 같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누구 아내, 누구 엄마만 있었다. 어제 갔던 그 길로 오늘 출근하고, 어제 왔던 그 길로 똑같이 퇴근해서 동동거리는 지친 여자만 있었다. 그랬던 내게 녀석의 말은 나를 여는 작은 밸브가 되었다. 그 말 한마디에 파르르 떨릴 만큼 무덤덤한 아낙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photo-1562295980-b598a39324dc.jpg © splashabout, 출처 Unsplash



"한 달에 한 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음악회에 갈 거니까 그날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일찍 와서 애들 좀 보세요"

1주일이 10일이었으면 열흘 동안도 너끈히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렸을 남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결혼해서 5~6년 만에 처음으로 얻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었다.

첫 음악회에서 천정을 뚫고 나갈 것 같은 어느 성악가의 울림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열 손가락 모두 심장이 들었는지 손가락 끝까지 심장이 나대듯 벌떡거렸다. 내가 운 건지, 눈물이 터져 나온 건지 분간할 수 없는 고해성사 같은 음악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밤, 내 발은 분명히 땅을 또박또박 딛고 있었다.

녀석은 가끔 애오라지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그곳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 하나를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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