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방담배 연기

by 순백 상선

어릴 적 할머니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같이 산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작은 절에서 스님들 밥을 해주며 지내셨다고 들었다.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이미 풍을 맞은 뒤였다.

걸음은 아장아장, 아이처럼 짧고 느리셨다.

열걸음도 안되는 거리인 방에서 부엌까지 나오는 일도 힘겨워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웃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그 작은 방이 할머니의 세상이 되었다.

그 방의 문은 늘 반쯤 닫혀 있었다.


방에서는 언제나 방문 틈 사이로 희미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한약 냄새와 곰방담배 연기가 섞인, 오래된 나무처럼 마른 냄새였다.


방 한켠을 제외하고 집 안은 늘 시끄러웠다.

안방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밥상이 놓였고, 텔레비전 소리가 흘렀다.

웃음이 터지고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소리는 웃방 문 앞에서 멈추는 듯했다.


할머니는 늘 따로 상을 받았다.

우리는 안방에 둘러앉았고, 할머니는 작은 상 앞에 혼자 앉아 드셨다.

그 풍경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저 어른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심부름처럼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화로 옆에 앉아 곰방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검게 그을린 곰방대 끝이 붉게 달아오르면, 할머니는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희뿌연 연기가 방 안을 조용히 채웠다.


연기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늘게 위로 오르다가도 천장에 닿으면 힘을 잃고 옆으로 퍼졌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도 쉽게 흩어지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장롱과 벽지, 이불 홑청에까지 배어 그 방만의 냄새가 되었다.


나는 그 냄새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매캐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연기 속에는 말 대신 삼킨 하루가 있었던 것 같다.


함께하지 못한 식탁,

부르지 않는 저녁,

혼자 등을 기대야 했던 시간들이 한 모금씩 타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할머니는 그 방에서 생을 마치셨다.


얼마 전, 친한 동생 집에 놀러 갔다. 그 집에도 닫힌 문 하나가 있었다.

그 집의 방 문 너머에는 동생의 시아버지가 하루를 삼키고 있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중국 음식을 시켜 먹으며 깔깔 웃었다.

짜장면 그릇이 놓이고, 젓가락이 부딪히고, 말이 겹쳤다.

그 방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동생의 시아버지는 없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그 문을 바라보는 순간, 오래전 우리 집 웃방이 떠올랐다.


방문은 닫혀 있었지만, 연기만은 틈을 비집고 나왔다.

안방의 웃음소리를 스치며 집 안을 맴돌다가도, 이내 힘을 잃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늘 같은 자리로 돌아갔다.

안방이 아닌, 집의 뒷곁으로.


그때의 나는 몰랐다.

집에도 중심과 가장자리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그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시간을 태우고 있다는 것을.


연기는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옷깃에 남고, 장롱 틈에 스며들고, 나의 어린 기억 속에 얇게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여겼던 시간들이

냄새로 남아 오래도록 떠돌았다.

나는 그 연기를 피해 문을 닫고 나왔었다.


이제는 안다.

그 연기는 외로움이 집 안을 돌아 나오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안방의 웃음은 오래 남지 않았지만,

뒷곁의 연기는 오래 남았다.


곰방담배 연기처럼.

말없이 피어올랐다가, 집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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