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돈 벌러 떠나고, 서울로 나간 오빠들도 없는 포도밭 외딴집.
논두렁 몇 개를 지나야 겨우 닿는 그곳에, 기차 소리는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곤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호롱불 하나에 의지해야 했던 시절.
매캐한 석유 냄새가 방 안을 채우면, 그 작은 불빛은 우리 모녀의 유일한 우주가 되었다.
캄캄한 밤, 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워 엄마 앞을 꼭 막아서며 나무 발판 위에 붙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 뒤에 숨어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던 그 시간을 지금 생각하면 참 정겹고 그리운 흙내음 섞인 밤의 냄새로 남아있다.
지독한 가난과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엄마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밭일의 고단함 속에서도 나를 심심하게 두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이 내게 옮겨붙지 않게 하려는 것이였을까.
엄마는 내 눈높이에 맞춰 온갖 놀이를 가르쳐주셨다.
호롱불 하나 켜놓고,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꼬아 만드는 실뜨기 놀이.
"이건 베틀, 이건 소쟁반!" 하며 엄마가 들려주던 정겨운 목소리와 수수께끼.
그리고 무엇보다 벽에다 손으로 만들어내던 그림자놀이가 생각난다.
엄마의 손끝에서 쫑긋거리는 토끼가 되고, 멍멍 짖는 개가 되어 벽 위를 누비던 그 모습들.
엄마에게 처음 배운 화투놀이에 꺄르르 웃음 터지던 그 작은 방이, 내 세상의 전부였고 가장 행복한 놀이터였다.
엄마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슬픔을 가리고, 내게는 오직 환한 그림자만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엄마가 남의 집 밭일 품앗이를 가고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외딴집 옆 큰길을 따라 울면서 엄마를 마중 나갔다.
무섭기도 했지만, 엄마가 여우한테 잡혀가기라도 했을까 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달 밝은 밤, 저 멀리서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올 때의 그 안도감이란.
그때 엄마는 품안에서 아껴둔 새참 빵을 나에게 내밀곤 했는데, 그 달콤하고 정겨운 빵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논 가운데, 서울에서 이사 온 복자네 집이 있었다.
그곳에 가서 밤 12시가 넘어 돌아와도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TV가 보고 싶어 남의 집 안방 한구석에서 눈치를 보던 딸의 마음을 엄마는 이미 읽고 있었던 걸까.
"배고프진 않았냐"며 따뜻한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던 엄마.
저녁까지 먹여주며 TV를 보게 해준 복자네의 배려가
이제야 사무치게 감사하고 또 미안하다.
밤마다 우리는 이불 속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잤다.
"숨 막혀!"
하면서도 엄마의 숨소리가 좋아 더 파고들었던 어린 날의 나.
그 포근한 가슴 향기가 지금도 내 코끝에 맴도는 것 같다.
살면서 세상에 부딪혀 힘든 일이 참 많았지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롯이 그 시절 엄마의 달큰한 숨향기 덕분이었다.
아흔이 되신 엄마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글쎄, 다 잊어버렸네. 내가 정말 그랬어?" 하며 남의 이야기 하듯 신기해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 대신 뜨겁게 차오르는 무언가를 삼키곤 한다.
당신은 다 잊어버리셨어도,
내 안에는 그날의 호롱불 같은 사랑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가난 속에서 다섯 형제를 끝까지 지켜내고, 이제는 야윈 손으로 내 마디 굵은 손을 잡으며
내가 바친 청춘을 보상해주겠다며 자꾸만 뭐라도 손에 쥐여주시는 엄마.
당신의 전 생애를 녹여 자식들을 키워내고도 여전히 줄 것이 남았다는 듯 내미는 그 손을 차마 마주보기가 어렵다.
자칫 가난의 그늘에 가려져 세상을 원망하는 법부터 배웠을지도 모를 나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 척박한 땅에서도 나를 결코 외롭게 두지 않으셨고, 덕분에 나는 비뚤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세상의 선의를 마주 하며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은 풍경을 지우고 엄마의 기억마저 앗아갔지만
호롱불 아래 우리를 감싸던 그 따듯한 온기가 있는 한 나는 생의 어떤 추운 길 위에서도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꺼지지 않는
가장 고요하고도 찬란한 빛이었음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