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비 내리는 어느 날

by 순백 상선

마당 가득 연분홍빛 꽃비가 내리던 봄날이었다.

바람이 한 번씩 마당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은 눈부신 비가 되어 내렸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가장 기골이 장대한 나무에 우리 자매를 위해 튼튼한 그네를 매어주셨다.

여덟 살인 나와 네 살배기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그 꽃비 속에서 세상 가는 줄 모르고 그네를 탔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투명한 햇살과 콧등에 내려앉던 꽃잎의 서늘한 감촉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그날의 살구꽃은 축복처럼 쏟아졌고, 우리는 그게 영원할 줄만 알았다.


그 날, 어머니는 나무하러 산으로 향하시며 내 손을 꼭 쥐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동생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절대로 멀리 나가지 말고 마당 안에서만 놀아라.”


하지만 어린 마음은 흩날리는 살구꽃잎보다도 가벼웠다.

마당 너머로 아랫동네 아이들이 덕고개 기찻길 밑 도랑에 ‘삐뚜렁(다슬기)’이 지천이라며 우리를 흔들어 깨웠다.


왜 그날따라 그 속삭임은 금단의 열매처럼 달콤했을까.

왜 그 아이들은 하필 그날 우리 집 담장을 기웃거렸을까.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망각한 채, 동생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둑방길을 나섰다.

보리나락을 베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활기찬 손놀림에 덩달아 신이 나 걷던 그 길.

그 길이 내 동생과 함께 걷는 마지막 생의 통로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초록빛 보리 물결이 일렁이던 그 길은 찬란해서 더 잔인했다.


뻐두렁을 줍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내 뒤로, 네 살배기 동생은 그림자처럼 나를 졸졸 따랐다.


그때였다. 기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날카롭게 외쳤다.

"기차가 온다 -"


비명 같은 경적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기찻길 밖으로 몸을 날렸으나,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동생은 차마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순식간이었다.


마당에서 보았던 그 살구꽃잎처럼, 내 사랑스러운 동생은 차가운 바람결에 온몸이 흩어지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 우주는 멈췄고 동생의 시간도 그곳에 고착되었다.


기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췄고, 적막을 깨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군가 넋이 나간 나를 붙잡고 어서 아버지를 모셔 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플라타너스가 길게 늘어선 아스팔트 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양조장까지 가는 그 길은 왜 그리도 멀고 숨이 막혔는지 모른다.


발바닥에 닿는 아스팔트의 열기보다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가 더 뜨거웠다.

아버지의 술통 자전거 뒷자리에 매달려 다시 덕고개로 돌아왔을 때, 내 눈앞에는 인세(人世)에서 가장 참혹하고 슬픈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가슴을 풀어헤친 채 먼지 자욱한 길바닥에서 몸부림치며 오열하고 계셨다.

젖을 떼느라 밤낮으로 보채던 어린 딸을 허망하게 보낸 어미의 그 한 맺힌 아우성이 50년이 흐른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울음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풍화되는 것이 아니라, 매년 봄이 오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문신처럼 가슴에 박혔다.


젖을 물리려던 그 빈 가슴으로 엄마는 잃어버린 막내딸의 영혼을 붙잡으려 허공을 할퀴고 있었다.


결국 동생은 아버지 친구의 지게에 실렸다.


우리가 신나게 뛰어갔던 그 보리밭 둑길을 돌아오는 길,

어느새 보리는 다 베어져 텅 빈 들판만이 우리를 배웅했다.


풍성했던 들판이 한순간에 민낯을 드러내듯, 내 마음 한구석도 통째로 베어져 나갔다.


동생이 한 줌의 재로 흩어진 이름 모를 산에는

그렇게 또 한 번의 계절이 속절없이 저물고 있었다.


그로부터 50년이라는 세월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여전히 그 둑길 어딘가에 멈춰 서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동생 또래였을 법한 아이들을 마주칠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활짝 웃는 그 아이들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네 살의 내 동생.

'살아있었더라면 저 아이처럼 어여쁜 숙녀가 되었겠지, 지금쯤은 나처럼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중년의 모습으로 내 곁에서 함께 늙어갔겠지.'

하는 부질없는 상상이 가슴을 헤집는다.


시장통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동생과 닮은 실루엣만 보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네가 누렸어야 할 평범한 일상들을 남의 모습에서 빌려 구경하며,

나는 대리 만족처럼 쓰디쓴 위로를 삼킨다.



사랑하는 동생아, 이제는 그곳에서 평안히 쉬고 있겠지.

언니는 여전히 그날의 우유부단함을 원망하며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채무를 안고 산단다.


네가 늘 곁에서 나를 지켜준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끝내 너를 지키지 못한 여덟 살의 나는 여전히 그 둑길 위에서 울고 있다.


50년이 흘러 내 머리 위에는 살구꽃잎 대신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너를 향한 그리움은 갓 베어낸 보리나락의 향기처럼 여전히 아릿하다.


살구꽃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여전히 그네를 타며 웃던 네 얼굴을 떠올린다.

꽃이 피는 것은 기쁨이지만, 꽃이 지는 것은 내게 여전히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을 문장으로 엮어 너에게 닿기를 기도해 본다.


보고 싶다 동생아.

언니가 정말 많이 미안해. 그리고 사무치게 사랑한다.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때는 절대로 네 손을 놓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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