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언어도, 인생도 축적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점점이 흩어져 한가로이 소들이 풀을 뜯는다. 가속도가 붙은 삶의 굴렁쇠가 멈추길 간절히 바라며 한때 머뭇거리고 휘청거렸다. 풍경을 보며 저 소들 중 하나이고 싶다고 투정부렸다.
"엄마, 나도 저 소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풀이나 뜯으며 느긋이 살고 싶어."
"풀 뜯는 게 편해 보여? 새끼 먹일라고 부지런히 젖 모으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쌔가 빠진다, 소들도."
아이구, 역시 울엄마 어록은 길이 빛난다. 그렇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모으고, 쌓아야 한다. 돈이든, 커리어든, 우정이든. 그들 중 의미 있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다 가질 순 없다.
돈도 그렇다. 가끔 통장에 축적된 숫자를 확인해 본다. 대박을 친 적도 없는 동네 조그만 교습소에서 발을 구르며 가르쳐 온 내 노동의 대가가 이 한낱 숫자로 상징되는 현실에 얽매어왔다. 모든 게 숫자로 판단되는 세상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결국 우리는 알게 된다. 숫자는 허상이다. 늘 바뀌고 거짓말을 친다. 믿을 게 못된다는 걸 깨달은 후 나는 숫자에서 자유로워졌다. 들고 나는 아이들 숫자도 마찬가지다. 처음 교습소를 열었을 당시(거의 삼십 년이 되어간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이 축적되고 내 통장도 쌓이고 쌓여 집도 사고 건물도 사고.. 끝이 없는 망상의 꼬리를 이어나갔다. 자영업은 덧셈과 뺄셈의 연속이다. 마이너스가 흔한 세계다. 축적은 요원했다. 내가 과연 왜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가 현타가 왔다.
마이너스란 기호는 결국 나의 스승이었다. 축적이었다. 플러스가 축적이 아닌가 반문하는 친구들에게 나름의 개똥철학을 설파한다. 마이너스를 통해 나는 결국 축적을 하게 되었다고. 플러스만 있는 세상은 쉽고, 쿨하게만 보인다. 더하고 더하고 올리고 올리고. 나는 언어생활을 하며 좀 더 깊게 배워가기 시작했다. 반전의 원리를. 영어든, 일어든 외국어를 공부해 본 이는 쉽게 이해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망각 속에서 꾸역꾸역 해내는 생산활동이다. 오늘 익힌 단어와 문장을 내일이면 까먹는다. 다시 익혀야 한다. 또 까먹고 익히고 새로이 배우고.. 이 과정을 지난하게 반복하며 축적해 나간다. 마이너스, 마이너스..플러스다.
통장에서 덧셈만을 행진하는 숫자를 보며 마음에 수소가스가 잔뜩 들어갔다. 그러다 뺄셈과 마이너스로 들쭉날쭉하며 널을 뛰는 숫자를 보니 목구멍에서 남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 이건 내가 아닌데. 마이너스의 행진이 어느 순간 인생의 쌩얼이라 깨닫게 되는 순간 그제야 다시 나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나왔다.
고시나 전문 자격증을 따기 위한 무거운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교사 임용시험에 도전하려다 육아와 건강이 발목을 잡아서 포기한 적은 있다. 그나마 내가 꾸준히 쉬지 않고 해온 공부라면 어학이다. 직업과 연결되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별개였다. 즉 외국어를 공부하는 순수한 개인의 즐거움과 아이들의 학업 향상을 도모해야만 하는 티칭은 결이 달랐다.
내가 즐기는 언어생활에서 플러스는 먼 손님이다. 느림보 깜짝 별풍선이다. 영자신문이나 원서를 읽으며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일일이 체크하기보단 등장한 단어가 뒤에 다시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한다. 그렇게 읽어가다 종종 밑이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 되곤 한다. 기대를, 욕심을 버린다. 그러다보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반복하다보면 내공이 쌓인다. 무림의 고수쯤은 아니겠지만 동네 고수쯤은 될 수 있을지 않을까 한다.
단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축적되어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콜레스트롤, 피하지방, 세상이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 갱년기다 보니 부정적인 마음과 불안, 나잇살이 나도 모르게 축적된다. 핑계라면 핑계다. 마이너스를 지향하며 오늘도 비우고 비우는 훈련을 하리라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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