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10. 덕질이 답이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뼈저리게 체험한다. 공부 좋아하는 아이는 없다. 시키니까, 해야 하니까 아이는 할 뿐이다. 게임을 하는 시간은 짧다. 얄밉도록 빨리 간다. 아이는 몰입한다. 태어나서 그토록 늦둥이 막내가 몰입하는 순간을 본 적이 없다. 아, 나도 저토록 몰입이라는 걸 해보았으면. 그렇게 부러웠던 적도 없다. 갱년기 타령을 하며 심드렁해져만 간다. 친구는 한탄했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관심사도 흥미도 사라졌다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내가 매일 OTT로 드라마보는 게 낙이라고 했더니 그마저도 부럽다고 했다. 드라마도 보기 싫고, 하고 싶은 것 자체가 없다는 게 슬픈 요즘이라며 넋두리한다. 반짝이기만 했던 우리들의 시간이 어느덧 뒷머리채를 흔들며 멀어져 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다.
우리도 한때 덕후였다. 십대의 나를 광적인 독서가의 길로 안내해 준 제다이 마스터는 '하이틴 로맨스 시리즈'였다. 웹툰도 웹소설도 없던 그 시절 밤을 새워 일일 일권을 하며, 수포자의 길을 기꺼이 택하며 수학책 아래에 숨겨 탐독했던 내 인생의 명저들. 섹시하고, 총명한 여자와 섹시하고 능력있고 매너는 기본인 남자의 밀당 스토리가 핵심인 시리즈를 탐독하며 나는 신세계를 접하고 꿈꿨다. 일명 '덕후'의 수련을 쌓았다. '할리퀸 로맨스', '아메리칸 로맨스'까지 마스터한 나는 성에 차지 않아 직접 쓰기 시작했다. 내가 갈망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그들의 미래를 내 손바닥 안에서 점치며 신나게 썼다. 반 아이들에게 돌려 읽게 하며 덕후의 정점을 찍으며 마무리했다. 그 시절 내 읽기와 쓰기의 토대가 된 이 시리즈들을 다시 읽고 싶어 헌책방을 순례하며 뒤진 적도 있다. 서점 아저씨는 웬 아줌마가 버려도 돈 안되는 쓰레기들을 미친듯이 뒤지고 다니는가 혀를 찼을 거다.
덕후는 행복하다. 덕질은 시들한 배춧잎 같은 삶을 파릇파릇 피어나게 한다. 로맨스 시리즈와 함께 한 내 십대에 안녕을 고하고 영어를 시작하며 '시드니 셸던'에 입덕했다. 언어의 마술사이자 세계적인 밀리언셀러 작가인 그의 대중소설을 영문판으로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인공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총명해야 한다는 것.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된다. 여자 한 명이 남자 두 몫 이상은 해내는 작가만의 요지부동인 시그니쳐는 나를 매혹시켰다. 심플한 문장과 숨막히는 전개로 셸던의 덕후는 요모조모 혜택을 입었다. 영어 원서를 꾸준히 읽게 되었고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었다. 대중소설만 읽다보니 작품성 있는 원서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지적인 욕구가 스멀거렸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에 푹 빠져 그녀의 단편소설들을 영어로도 읽고 번역본으로도 읽으며 그녀에게 나의 덕질을 바쳤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관심있는 영역만을 덕질해왔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덕후는 성공한 인생이다. 물질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아도 그들의 시간은 재미지고 풍요롭다. 고교 시절 반의 한 친구는 당시 광적인 인기를 누리던 영국 보이밴드 '듀란듀란'의 덕후였다. 리더인 사이몬 르본의 가정부로라도 들어가는 게 그녀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 목표 덕에 그녀는 관심도 없던 영어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에 학교를 졸업한 후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가졌다. 영어 학원에서 수석 강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했다.
그 후로도 난 그 친구가 끊임없이 성장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을 법한 팝스타의 가정부가 되기 위해 그녀가 쏟은 그 열정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짓게 된다. 그녀 안에 탑재된 그 에너지는 언제든 날개가 되어 줄 것이기에.
덕후의 불꽃이 사그라져버린 지금 잿더미 속에 꺼진 불씨를 살려보려 몸부림친다. 에너지가 부족한 내가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건 책이다. 영어든 한글이든 문자 중독은 평생 가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한편씩 글을 쓰며 좀 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자 날개짓하는 나에게 특급 칭찬을 던져준다. 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한다면 나는 그냥 잔소리쟁이 할머니로만 늙어갈 것이기에. 내 지적인 허영을 채우기 위해 소설도 끄적여 본다. 에세이를 두 권 써서 출간까지 하고 나니 더 이상 에세이는 쓰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대부분의 글쟁이들의 종착점은 소설이라 하지 않는가. 그만큼 스토리는 매혹적이고 본능적인 우리의 자질이기에. 나는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니 스몰스텝으로 A4 한 장씩만 쓰기로 결정했다. 드라마 덕후도 언젠가는 시시해질 것이라는 염려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내가 써서 킬킬거리고 우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허영심의 발로다. 약간의 허영심이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텃밭을 가꾸어 직접 기른 채소를 먹고, 도자기를 빚어 근사한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줌바 살사를 섹시하게 추는 모든 덕후를 추앙한다. 나의 욕망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언어 덕후의 생활이다. 그 무한하고도 신비한 매력에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다. 세상 어느 재미보다 깊다. 세상 모든 덕후여, 오늘도 우리 함께 덕질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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