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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순 Jun 12. 2024

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7.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늦깎이 대학원생 시절이었다.(그래도 서른을 갓 넘은 시절, 지금보면 얼마나 싱그러웠던가!) '마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타오르는 교수님이 있었다. 교수님의 주전공인 음운론, 음성학 같은 수업을 할 때면 온몸엔 살얼음이 돋았다. 교육대학원 특성상 절반이 현직 교사들이라 면학 분위기는 적당히 긴장되고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마녀'의 수업 시간엔 가차없었다. 온 몸이 얼어붙어 더듬더듬 영어를 읽는 현직 중년 교사에게 마녀는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감히 이 발음으로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당신이 교사 자격이 있냐고. 안쓰러운 마음에 곁눈질로 올려다 본 선생님은 닭 볏을 단 듯 목부터 시뻘게졌다. 

몇 학기의 수업을 들어본 선배나 동기들은 마녀를 일제히 칭송했다. 비록 정나미는 떨어지나 수업은 확실하다고. 교수님의 실력은 입댈 여지가 없다고. 


운 나쁘게도 과대표를 맡게 된 어느 학기에 나는 사력을 다했다. 마녀에게 찍혀 옴싹달싹도 하지 못하는 잠자리 신세를 면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주요행사인 야유회가 끝나고 마녀에게 뜻밖의 칭찬을 들었다. 장소나 모든 것이 마음에 들고 흡족하다고, 정말 수고 많았다고. 순간 가슴이 솟구쳐 지붕 뚫고 킥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극에서 본 성은을 입은 궁녀의 심정이랄까.. 


그 학기에 대표로서 맡은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교수들을 자주 접촉해야 했다. 어느 날 마녀 교수가 외국인 교수와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하고 있었다. 교수 연구실을 찾은 나는 그들의 스몰토크를 운 좋게도 여유를 가지고 리스닝 할 수 있었다. 오하이오 촌사람이지만 깨끗한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교수와 마녀는 제법 궁합이 잘 맞는 듯 보였다. 


여기서 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나의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던 영감이 있다. 흔히 교수 정도 되면 대부분의 언어 평민들은 가지게 되는 편견이 있다. 고급 어휘와 어려운 용어를 현란 그 잡채로 혀를 놀려가며 언어생활을 과시할 것이라는 상상. 이런, 편견쟁이. 나는 그 순간 팔꿈치 킥을 당했다. 수업시간엔 소설 <소공녀>의 사립학교 교장인 '민친' 선생같은 이미지를 고수하던 마녀는 봄날의 햇살이 되었다. 그녀의 눈과 입가엔 살랑살랑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곤 중학교 교과서용 회화를 유창하고도 당당하게 구사했다. 핑퐁을 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스몰토크는 결코 어려운 먼 나라 언어가 아니었다. 충분히, 부족함 없이 교수 영어가 아닌 중학 수준의 영어로 그들은 그 어느 봄날 오후를 화사하게 수놓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 오하이오 시골에서 이방인과의 그 오후에 나도 함께 하고픈 초대받지 않은 자의 갈망이 일었다.


우리는 부족하지 않다. 나는 중학교 입학 후에 알파벳을 배운 세대지만, 나보다 젊은 학우들은 영어를 벗삼을 시간이 더 허락되어 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다. 지겹도록 영어를 했지만 외국인 앞에만 서면 입이 얼어붙는 이유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강박증에서 비롯된다. 쟤 영어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남 평가질도 한몫한다. 여기서 '잘한다'는 우리의 기준은 '완벽함'이다. 다시 영미권에서 태어나지 않고선 원어민처럼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우린 알지 않는가. 가망 없는 기대치를 붙들고서 언제까지 나를 학대하며 아름다운 시간들을 놓칠 것인가. 마녀 교수를 올릴 때마다 나는 유쾌하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엔 별로일지 몰라도. 독신의 당당한 교수님이 뜻하지 않게 던져준 교훈이 여지껏 나의 슬기로운 언어생활을 영위할 있는 씨앗이 되었다. 


치앙마이의 풍만한 마사지사 아줌마도 거리낌 없이 영어를 구사한다. 단어 단어씩 "Hurt?" (아프지 않아요?), Okay? (괜찮아요?), Tea? (차 줄까요?). 황금빛 찬란한 불상의 미소를 담아서 슬기로운 언어생활을 하며 슬기롭게 돈도 번다. 


우리는 늘 부족하다고, 완벽하지 않다고 입을 다문다. 돈, 시간을 들여 해외에 나가서도 입 다물고 폰에만 코를 박는다. 넓은 세상에 나와서도 네모난 창 속에 나를 가둬버린다. 고개를 활짝 들고 이방인과 눈을 마주치면 미소짓자. 가볍게 Hi~를 날리자. 평생 영어를 했지 않은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핑계는 접어두고 내가 알고 있는 한 두마디와 아낌없는 미소로 아름답고 귀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뚜껑을 열었을 때 푹 꺼진 계란찜이라도, 한 쪽이 찌그러진 계란찜이라도 완벽하다. 맛있다. 부족하지 않다.


#충분함 #슬기로운 언어생활 #모두가 완벽한 계란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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