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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순 May 28. 2024

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5. 개인의 문화


소싯적엔 집을 들며 나며 방황과 배회를 벗 삼았다. 엄마는 이런 나를 '산돌귀신'이라 불렀다. 집에 붙어있는 법이 없고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 친구들 집에서 기식하는 딸래미를 일컫는 닉네임이었다. 귀신이지만 그 어감이 흉악하지 않고 귀엽게만 들렸다. "엄마, 귀신 나간다." "밥 먹고 나가야지, 산돌귀신아!"


사춘기를 넘어가며 어느샌가 나는 집순이가 되어갔다. 사춘기의 특권인 은둔자의 삶을 맘껏 누렸다. 새롭게 알을 까고 나오려는 또 다른 자아를 탄생시키기 위해 알을 품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방구석은 당연히 나의 수련장이 되어갔다. 멀고 먼 청춘의 방랑길을 돌고 돌아 한바탕 소담스러운 가십파티가 끝난 뒤의 고요한 동네 우물가에 어느덧 나는 서 있다. 다시 나는 방구석으로 돌아왔다. 디지털 노매드도 아닌 방구석 칩거인이 되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가식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이제 주름지고 평온해진 내 민낯도, 극혐하던 나의 내향형의 기질도 더없이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엄마가 물려준 나만의 유산인 유전자를 거부하던 그 세월이 무색하게도 나는 나로 돌아왔다. 강을 거슬러 영원히 쉴 곳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무얼 해야 한다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증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이 이제 내게 남겨진 숙제다. 세상이, 결국은 내가 부과한 것에 불과한 가짜 숙제들을 버리고, 진짜 숙제말이다.


좋아서 시작하고 즐겨온 영어도, 독서도, 글쓰기도 정작 그것들이 나를 가두는 또 하나의 감옥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즐거움을 또 하나의 자기계발이란 도구의 총알받이로 전락시키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다.

조재도 작가의『퇴직 후 잘사는 인생』에선 '개인의 문화'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 문화는 자신이 자기 의지에 따라 하루 24시간을 조직하는 힘이다. 무엇을 하며 하루를 한 달을 또 일 년을 보낼지, 그런 가운데 자기 삶의 성취 목표가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며,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것인지를 자기 힘으로 조직하고 배치하는 일이 곧 자기 문화이다. 자기 문화는 그 사람의 삶이며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구절을 읽고 마음에 쉼표를 찍으며 곱씹어 보았다. 오늘 아님 내일 일을 그만둘까, 일을 그만두면 무얼하지, 경제도 어렵고 남들은 살기 힘들다는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뒤섞인 채 돌아가는 나날이 반복된다. 꺼져가는 화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는 갱년기라는 빳따를 정통으로 맞은 내가 흐늘거린다. 작가는 단호하다. 계획이 있다. 퇴직을 하고 글을 쓰며 단순하게 살리라는 단단한 계획이 있는 그의 말에 신뢰감이 갔다.


작가와는 달리 한없이 흔들리지만 그래도 나를 지탱해주며 링안에서 KO 패 당해 큰대자로 고꾸라지게 놔두지는 않는 '나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아니, 재발견해본다. 심드렁하고 읽을 거리가 없더라도 어떤 책이라도 집어드는 습성, 읽고야 마는 고집, 손때묻은 영어 소설, 잡지들, 동네 아이들 영어 훈장 노릇, 쓰기 싫어도 가끔 통통거리며 경쾌한 음악을 팅겨주는 글쓰기 자판, 대신 댓가로 순수한 성취감을 되돌려 주는 나만의 쓰기 행위, 가기 싫어서 발을 질질 끌며 들어갔다, 가벼워진 몸으로 춤을 추며 걸어 나오는 동네 필라테스장.. 그러고 보니 나, 문화 있는 여자였어! 해파리처럼 영혼 없이 떠 있는 줄 알았지만 (미안해, 오대양 해파리들. 너희들을 모욕하는 게 아니란다), 결국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구나.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멈추어있는 듯 느리지만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결국 '자기 문화가 있는 사람'이었고, 오늘도 나만의 언어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자기 문화가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의 말이나 사회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어 가기 때문에 늙는 일에 대해서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자기 삶의 중심을 잘 잡고, 자기 문화 속에 형성된 '사는 힘'을 바탕으로 현명하게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문화는 비유하자면 배의 닻과 같은 것이다.끊임없이 일렁이는 바다에서 배가 표류하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것이 닻이다."


까짓것 힘들면 몸에 힘을 제대로 빼고 물 위에 누워본다. 마음대로 떠내려가게 두고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도 보고, 먹구름 잔뜩 낀 흐린 하늘도 본다. 그러다 다시 팔다리에 힘이 들면 우아하게 헤엄쳐본다.



#언어생활 #자기 문화 #쉬었다 가는 슬기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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