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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순 May 21. 2024

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4. 선택과 집중


날이 갈수록 새벽잠은 달아나고 한동안 뒤척이던 머리 속엔 이런저런 잡히지 않는 생각들이 헤엄쳐 다닌다. 그러다 놓쳐버린 새벽잠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에 백기를 든다. 그리고 나에게 어김없이 다가온 또 하나의 하루를 선택한다. 눈은 여전히 닫혀있지만 나의 뇌는 벌써 가동하기 시작한다.


오늘 아침 반찬은 뭘 하지? 냉장고 야채실에 뭐가 남아 있었지? 두부 한 모가 있으니까, 달래 무침이랑 달래 된장국에다 계란찜에.. 새벽부터 내 의식은 끊임없는 선택으로 열일한다. 드디어 아침 메뉴 셋팅이다. 이젠 어떤 재료들로도 뚝딱 한상 차려낼 수 있다. 냉장고 파먹기의 달인이 되었다. 살림에 잼병이라 절망한 나날들을 보내고 주부 짬밥 24년 차에 이른 덕분이다. 눈을 뜨는 순간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집중으로 하루는 열린다. 번잡스러운 아침이 지나고도 선택은 집요하게도 내 허리를 감싸며 이끈다.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고, 점심 메뉴를 선택하고 하루를 집중해나간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 점은 선택지가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한 살 씩 먹을 때마다 돈은 들였지만 볼품없어진 옷을 하나씩 처분하듯 선택지가 하나씩 폐기된다. 세상의 수많은 쾌락과 야망 속에서 결정장애자로 비틀거린 지긋지긋한 청춘을 시원하게 보내버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것도 자연의 법칙이리라. 이 법칙에 따라 나는 단순함과 미니멀리스트를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것은 집중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아간다는 것. 더 일상 멀티테스크란 허상의 블랙홀에 쓸려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진정 내 것이 아닌 가짜 능력들로 치장하고 보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세상 많은 쾌락들에 흥미가 갈수록 떨어지니 바야흐로 미니멀하고도 진지한 삶이 펼쳐진다.


결혼을 선택했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집중했다. 부부, 엄마, 일에서 차츰 선택의 단계를 높여 나갔다. 가파른 계단식이 아닌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느림보 거북이가 소리없이 나아가듯이. 그렇게 선택지를 늘이고 집중했다. 그만큼 젊음을 내달렸다. 그만큼 성장하고 소진해왔다. 이젠 하나씩 하나씩 남겨야만 하는 것을 확인하고 거른다. 쓸데없이 상처받는 인간관계, 유행따라 충동구매한 옷과 물건들, 가족에 대한 과잉 짝사랑도 포함이다.


언어생활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된다는 공부법, 과대포장된 상술의 홍수 속에 헤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고 최적화시킨 습관을 지속할 뿐이다. 좋아하는 원서를 읽고, 연인과 밤새 조곤조곤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 기분으로 낭독한다. 이유없이 몸과 마음이 처질 때면 속으로 우울한 독백만을 하기보단 입을 움직인다. 내 귀로 내 음성을 들으며 읽다보면 누워있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난다. 배우가 되어 때론 비장하게, 명랑하게, 무드있게 대사를 뱉으며 나만의 무대에서 공연한다. 어제는 비극, 오늘은 블랙코미디, 내일은 또 어떤 장르일까 기대하며 설렌다.


선택을 하고나서야 집중을 한다지만, 집중과 몰입을 하다보면 선택지가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시드니 셀던, 존 그리샴의 대중소설에 먼저 푹 빠져서 영어를 접했다. 이야기의 바다에 잠겨서 그 파도를 타고 흘러가다보면 미지의 섬들을 만나고 미지의 대륙에 닿게 된다. 읽기로 영어라는 언어에 친숙해지니 그 언어의 문화권을 맛볼 수 있었다.(음, 미국은 소송의 나라구나! 사랑, 배신과 복수는 인간사의 삼종 세트구나!)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하거나 체류하지 않아도 방구석에서 가성비 있는 나만의 어학연수를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말한다. 업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니, 자연스레 취미로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 말도 맞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다. 나의 경우엔 영어소설과 영화에 푹 빠지다 보니 영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집중을 하다 보니 선택지가 생기게 된 거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거다. 반드시 선택을 해야 집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떨결에 푹 빠져서 덕후스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내가 할 일이 생기게 되는 경우다. 또 다른 취미로 수영, 도자기, 트래킹에도 빠져 보았다. 필이 꽂히는대로 하다보면, (단 진정성을 가지고!) 그 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 나의 양식이 되었다. 고로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더 이상 소란스런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이 드는 이 나이가 나는 좋다.


#언어생활 #나이 #선택 #집중 #단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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