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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순 May 07. 2024

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2. 언어로 숨쉬는 법을 배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 소설은 <제인에어>다. 현대문학까지 통틀어 단 하나만을 꼽으라 한다면(사실 말이 안되는 미션이지만) 심사숙고까진 아니더라도 '미스 에어'를 간택할 것이다. 초등학교 때 아동용 문고판으로 영접한 이래로 십대, 이십대를 거쳐 아직도 내 갈비뼈 깊숙이 매듭진 끈으로 그녀는 나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를 보면 뒷배없는 흙수저에 평범한 외모, 특출한 재능도 없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어린 제인이 꼴통 사촌 때문에 매질을 당하고 붉은방에 갇혀있을 땐 내 유년시절의 붉은방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그녀의 매력은 주어진 불리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고결하고도 꿋꿋하게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그녀의 의지였다. 그래, 그녀는 은근히 깡있는 여자였다. 불어를 멋드러지게 하고, 그림도 기깔나게 그리며 책을 사랑하는 그녀는 내 어린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심지어 성안에 비밀스럽게 갇혀있던 미친여자(로체스터의 부인)가 불길로 뛰어내리는 장면마저 소름이 끼칠정도로 좋았다. 이래저래 머리 굴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그냥 돌진해버리는 그녀의 모습이 쿨해보였다. 로맨스, 호러, 미스터리가 버무려진 고전이 된 이 소설과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와중에서도 답답한 계급과 인습의 굴레에서 제인이 숨쉬는 도구는 배움과 교양이었다. 내 교양의 무게는 얼마인지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노력하며 살리라는 다짐과 영감을 그녀는 나에게 주었다. 어렴풋이 그녀를 덕질하면서 그때부터 내 삶의 행로를 정했을지도 모른다. 병약한 몸으로 골방에 누워서 책을 친구 삼아 접한 언어들은 나를 세계문명의 시민으로 초대했다. 꿈많던 사춘기 시절에 접한 미지의 꼬부랑 글자들은 나를 끝없이 매혹시켰다.


그때부터 나는 언어로 숨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모국어에 더해 나를 본격적인 모험의 세계로 초대해 준 외계어는 영어였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알파벳으로 시작해 영어의 세계를 열어주신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다리 한 쪽을 절면서도 늘 하얀 이를 가득 드러내며 웃으신 선생님. 아이들을 줄 세워서 교과서 본문 전체를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암기시킨 나날들. 덕본에 내 영어의 기초가 다져진 시간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느덧 중년의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설렌다. 원어민 흉내를 내고자 하는 어쭙잖은 야심을 포기하고 더 자유롭게 언어 덕후인의 삶을 즐기고 있다. 토익, 토플, 어학자격증 따위의 목표도 졸업한 지 오래다. 회화를 마스터하리라는 유치한 목표도 없다. 언어에 대한 모든 굴레와 장애물을 벗어던지고 제거하니 내 앞엔 허허벌판 광대한 자유가 펼쳐진다. 저 지평선 너머로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으로 숨쉬느냐에 따라 삶은 제각기 달라진다. 명품, 맛집, 차, 집으로 숨쉬는 사람이 있다. 중력의 법칙을 철저히 따라가는 얼굴을 보톡스와 각종 시술로 숨쉬게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겁이 많은 내가 얼굴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도 무시못한다.) 비교가 낳은 우월의식, 열등의식으로 숨쉬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다양한 인생들로 오늘도 돌아가고 흘러간다. 


백세시대라 부르짖는 요즘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오추기에 들어선 지금 생각이 활화산이 되어 수시로 들끓는다. '과유불급'이라고 생각도 끓어 넘치니 심신이 피폐해진다. 하지만 버릴 없는, 끝까지 지키고 싶은 나만의 나무 그루를 품고 있다면 길을 잃지 않는다. 나무가 나에겐 언어다. 삶은 나무를 중심으로 잎이 열리고 숲으로 울창해져간다. 갑작스러운 요동을 치며 새들은 날아갈지라도 숲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


'Men have forgotten this basic truth.' said the fox.

'But you must not forget it.

For what you have tamed, you become responsible forever.

You are responsible for your rose..'

(여우가 왕자에게 하는 말)

'어린왕자는 잊어서는 안 돼.

만약 무언가를 길들였다면, 그걸 영원히 책임져야 해.

어린왕자 별에 있는 장미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The Little Prince>


알게 되고 가까워진 것에 책임을 진다는 말을 되새겨본다. 모국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나를 길들였고 나 또한 그들을 길들여간다. 우리는 서로가 어린 왕자와 장미다. 서로의 향기를 맡으며 숨쉬는 법을 익힌 우리는 오늘도 사랑을 나누며 하루를 수놓는다.


#제인에어 #언어 #숨쉬는법 #길들이기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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