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12. 나를 납득시켜줘
영화 <건축학개론> 을 보며 한때 풋풋한 첫사랑에 가슴 설렜던 나의 스크린을 펼쳐보았다. 신입생 첫 단체미팅 때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남몰래 심쿵했던 남학생을 행여나 다시 마주치기를 기도하며 등교했던 나날들.
90년대 대학시절을 영화를 통해 소환할 수 있어 행복했고, '전람회'의 노래에 푹 잠기며 회춘할 수 있었다.
첫사랑에 빠져 어리버리한 친구의 날림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하는 캐릭터 '납득이'는 영화의 감초였다.
"아, 납득이 안되네~!"
영어와 사랑에 빠진 나는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보카3300', '토익', '토플'책을 붙들고 씨름하던 선배들을 흉내도 내보고 '타임지'같은 영어 잡지도 구독해 보았다. 'AFKN' 방송잡지를 구독하며 총알 같은 속도로 빗발치는 테이프를 늘어지게는 아니고, 나름 열청하며 받아쓰기도 해보았다. 그러다 장렬히 전사를 반복했다.
숨가쁘게 진화하는 트랜드를 따라서 온갖 난무하는 영어 공부법을 읽고, 들으며 무작정 따라쟁이가 되었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100일 만에 원어민이 될 수 있다(차라리 웅녀가 되는 게 빠르겠다!), 미드 한 편이면 영어 정복할 수 있다.. 각종 방법론만을 찾아 헤매던 나는 사람을 풀어 불로장생약을 찾아오게 한 진시황의 심정이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한 그의 마인드와 영어를 잘할수 있는 지름길만을 찾아 헤매던 나의 무대뽀 정신은 거의 오버랩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 납득이 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 길이었다. 고통과 지루함만을 양산하는 그 방법들은 결코 나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이 헛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시행착오'같은 구태의연한 용어가 진리인 셈이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신의 은총이다. 좁은 시야가 조금이라도 넓어지고, 세상, 삶은 다양하다는 깨달음의 은총을 받으며 익어가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만나는 사건, 사람, 일들이 나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그들은 내 삶에서 가지치기된다. 어떻게든 견디며 해보자는 모토는 짧은 인생에서 이젠 의미없는 종소리로 울린다.
나는 스토리와 맥락이 있어야 납득되는 존재다. 언어생활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습득하는 방법들 중에서도 스토리와 맥락이 있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내 영혼이 설득되고 풍요로워진다. 미드나 영화는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고 때로 가슴을 울리는 명작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 여운이 오래가진 않았다. 정겨운 질감의 페이퍼백을 읽으며 여유롭게 그 문자들 속의 인물과 사건을 더듬는다. 친절하게도 그 캐릭터들은 내게 말을 걸고 나는 사건을 함께 쫓아가며 숨 쉰다. 팔랑귀에 솔깃하며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언어생활은 나에게 맞지 않다. 책을 읽으며 나는 스토리 안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살아있는 원어민의 대사를 함께 치며, 헐리우드 배우가 되어 종횡무진한다.
내가 좋아하는 원서들을 반복해서 읽는다. 표현과 대사들이 자연스레 내 안에 들어앉게 된다. 지루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나가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다. 페이퍼백은 가벼워서 휴대하기도 그만이다. 종이색이 누렇게 되면 빈티지스럽고 고급 져 보인다. 외출할 때 가방에 챙겨 넣으면 만 원짜리 에코백도 명품백이 된다. 지각쟁이 친구를 기다리며 한 페이지씩 읽으면 기다리는 그 시간마저 돌체라떼가 된다.
늦둥이 막내는 중학생이 되며 사고를 끊임없이 쳤다. 참다못한 선생님께서 상담치료를 권고하셨다. 청소년 상담센터 선생님이 상담 후 최종적으로 정리해 주셨다. 금쪽이는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납득이 되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움직이는 존재라고. 그럴때야 열심히 파고드는 존재라고. 아, 이런 존재를 나는 몰라보고 사고뭉치 취급했었다. 선생님도 프레임을 씌었다.
언어생활 뿐 아니다. 내 인생의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든, 바윗덩이를 던지든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들이면 호수는 곧 잔잔해진다. 계속 요동치지 않는다. 중년의 고개는 끝없이 가파르다. 그래도 분명 끝은 있다. 아직 보이진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코 앞만 보며 올라가면 된다. 왜? 이젠 납득이 되니까. 내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가야할 시간이 나를 끊임없이 설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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