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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정순 Jul 24. 2024

보톡스보단 외국어

중년 덕후의 슬기로운 언어생활

13. 마이 온리 론리 러브


30대 그 어느 날인가, 40대 어느 날인가, 새벽 정적이 내려앉은 거실에서 난 통곡했다. 소파를 부여잡고 허리를 뒤틀며, 어깨를 한없이 떨었다. 철없던 20대에 스치듯 읽었던『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고서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여자의 가슴은 숨이 차올라 이불킥을 해야 했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왔나, 어리석은 짐승으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이 굴레 안에서 진정 어떻게 자유를 찾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사지를 뒤트는 그녀를 새벽의 정적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숙제를 한 뒤 검사를 맡듯 세상의 눈초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오늘 내일을 허겁지겁 살아가던 때였다.

쉼 없이 구르는 머리만 있을 뿐 가슴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너의 가슴에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이며 숨을 쉬는가 조르바는 비웃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교습소를 운영하며 아이 둘을 낳았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전전하며 커갔고, 내게 주어진 의무와 숙제를 해치우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서로가 달라도 공감하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와 나는 외로웠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그날그날 할당된 생산량을 쳐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에 불과했다.


현타의 시간은 누구나 온다. 세상 만물까진 아니더라도 내 주어진 하루 중 티끌만한 순간이라도 트리거가 된다. 김누리 교수님의 책『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고 내게 가장 깊게 각인된 단어는 '자기착취'였다. 나를 비롯해 우리 사회는 '자기착취'에 학습되어 있다. 얼마를 벌어야 하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성공, 성공, 자기계발이란 이름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있다. 조르바는 중년의 고개에 이른 나에게 다시 한 번 일침을 가했다. 그 굴레를 벗어던지라고. 가슴에 귀를 기울이며 살라고.


언어생활은 나의 숨통이다. 말보다 글이 내게 신뢰와 휴식을 제공했다. 사람의 말은 오히려 영혼을 쉽게 피로하게 했고 편견의 씨앗들을 뿌려 나를 세상으로부터 왜곡시켰다. 그러다 어느 행운의 시간이 주어져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은 책으로 이어졌고 책을 쓰는 그 시간 나는 많이 웃고 울었다. 가슴의 소리에 원 없이 귀 기울였다. 책을 출간했지만 나를 둘러싼 물리적인 세상은 변함이 없다. 유명해지지도 않았고 돈을 벌지도 못했다. 하지만 변했다. 안에서 빅뱅이 일어났다. 세상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비우는 법을 배워가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법을 책은 알려주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든 채워가려는 것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버리려는 것도 모두 자유이자 권리다.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져가 둥지에 자유가 너그러운 벗으로 자리 잡는다. 그 시간들을 나만의 레시피로 재편성할 수 있다. 하기 싫은 일보다 하고 싶은 일들로 채울 수 있다. 내 가슴이 허락한 일이다. 우리에겐 조르바는 로망으로만 남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 우리 세대는 코웃음친다. 퇴사를 하고 대책없이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눈부시다. 가진 걸 잃지 않으려는 꼰대들이 지게 한 짐들을 그들은 용기있게 던져버린다. 좀 더 조르바와 닮은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기로 했다. 내 로망, 자유인 언어생활이 있기에. 남은 삶에 그들이 있어 두렵지 않다. 육체는 나날이 스러져가지만 내 안의 자유는 침범될 수 없다. 브런치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를 쓰고, 에세이를 쓰고, 소설을 쓰는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언어생활자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깎고 갈고 매만져 반짝이는 보석으로 인터넷의 우주에 쏘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쓴 글들이 허공에 날려버리고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릴지라도 그 어느 먼지 티끌 하나가 어느 메마른 가슴에 내려앉아 싹을 틔울지 모를 일이다. 내가 쓰는 글 한 자 한 자가 가슴을 콩콩 울리는 나만의 영혼의 리듬으로 끝나버릴지라도 나는 행운아다. 지구별에 와서 존재한 시간 속에서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나그네다.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은 수많은 아름다운 가슴의 소리가 글로 환생한 책이다. 내게 존재하지 않은 머나먼 시간속의 소리들이 언제든 내 가슴에 내려앉는다. 언어생활을 하며 내 가슴은 한 뼘이나마 자라고 넓어진다. 책을 읽지 않는 이도, 책을 읽는 이도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 그것이 진짜라는 걸 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괜히 마음에 먹구름이 한 점 낀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며 세상 행복한 막둥이도, 아메리칸 드림에 무너지는 개츠비를 읽으며 달콤쌉싸름한 해방을 맛보는 나도 모두 모두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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