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걱정과 고통은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
'추억'이란 말은 물리적인 시간이 지나야 떠올릴 수 있는 단어라 여겼다. 우리말 <추억>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헐리우드 고전 영화 <The Way We Were>처럼 쌉쓰름한 사랑의 추억이 전형적인 추억의 레퍼토리인 것처럼 어쩌면 '추억'은 아름답고 깊이를 알 수없는 나만의 비밀의 화원일 것만 같다. 입가가 야릇하게 올라가는 나만의 일기장.
인생 최애 영화 중 하나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에 일단 제목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한창 신혼의 단꿈이 아닌 쓰라림에 몸부림치던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혐오했다. 이토록 배반의 장르였던 결혼, 기대에 대한 배신에 신혼은 시작부터 한없이 삐걱대며 나를 뒤흔들었다. 쓰디쓴 입안을 블랙커피로 끊임없이 헹궈내며 나는 스릴러와 호러무비에 빠져 들며 안식처를 삼았다. '영원한 추억'도 아닌 '살인의 추억'이라! 어떻게 이런 이율배반적인 제목이 있을까...
그때부터 '추억'이란 말은 나에게 다른 뉘앙스로 각인되었다. 과거형도 아니고 완료형도 아닌 진행형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살인의 트라우마(가해자든 피해자든)가 영원히 지속되듯 우리가 숨쉬는 한 삶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 또한 진행형의 추억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마디가 아프고, 밤새 뒤척이며 불면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의 엿가락을 늘이며 또 하루라는 고개를 넘더라도 그럭저럭 오케이다. 음, 어금니를 질끈 깨물면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락가락, 꽃 여자 널뛰듯 하는 멘탈은 진정 달갑지 않다.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진정 엄마의 유전자, 하늘 아래 찐 창조물이자 데칼코마니라는 걸 순간순간 뼈저리게 맛본다. '아이고, 아야아야, 우리 정수이, 엄마가 아파죽겠다.' 터프한 엄마가 가족들에게 값싼 동정표를 얻기 위한 엄살이자 몸부림으로 여겼다. 엄마는 매일 아파. 아픈 게 일이야. 엄마가 보기 싫어 외면했다. 내가 그 벌을 톡톡히 치르고 있구나, 이제. 그래, 달게 받자. 그래도 싸지. 이 호르몬의 격동이 출렁이며 아이들에게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 내가 이제 일을 접을 때가 되었구나. '이 일'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업을. 내 감정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그늘이 거울을 볼 때 마다 두 눈 아래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점엘 가도, 쇼펜하우어의 열풍 속에서 그의 다크초콜릿 같이 묵직한 문장들도 내게는 먼지로 흩어질 뿐이었다.
10년 넘게 불면증이 추억이 되고 있는 친구는 그 자체로 철학자가 되었다. 그녀와 나는 한주에 한번은 꼭 통화하고 두주에 한번은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쓰디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쓴 이야기들 뒤에 다디단 디저트 한입처럼 해소되는 짧은 순간에 있다. 서로의 불면의 고통을 나누고 갱년기가 던져주는 화두들을 곱씹는다. 그래, 이제 우리의 갱년기의 추억이 시작되는 고로 축배를! 비통해하지도 말고 앙앙대지도 말자. 우리의 걱정과 고통은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발현이 되니 고통은 기쁨과 쌍둥이다. 이런 저런 위안으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