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그림자와 퍼펙트 데이즈
우리의 걱정과 고통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나발을 불어대며 친구와 나는 각자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돌아서자마자 우린 안다. 오늘 밤 우리의 침상은 여전히 그림자란 환영으로 일렁일 것이며, 나는 두려움과 포기로 버무려진 소박한 저녁을 꾸역꾸역 삼키고 그 침상을 마주할 거라는 걸.
그러고 보면 나는 유달리 그림자에 집착했다. 학부시절 독일 문학 시간에 읽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 없는 사나이》는 매혹으로 다가왔다. 부귀와 명예를 위해 자신의 영혼, 즉 그림자와 맞바꾼 남자의 기이한 이야기 속에서 나 또한 그 남자와 함께 북극까지 방황했다. 세상의 끝까지 추격당하고 추격한 남자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야기 밖의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혹자는 오십의 고개를 넘으면 와인이 숙성하듯 익어가는 게 인생이라고, 또 누군가는 오십이 넘으면 어차피 사람은 모두 내리막길이라고 떠들어댄다. 음, 모두가 나름 옳은 말이라 생각된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견뎌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원자폭탄을 맞은 것처럼 내 신세가 비할 바 없이 참혹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럴 여유를 가지려고 애라도 쓰지 않으면 남은 인생 피폭자로 견디다 끝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우울과 순간의 반짝이는 희열이 하루에도 수십 번 교차하다가 나름의 필살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비장의 칼을 빼든 방책이 글쓰기다. 갓 오십의 문턱이 코 앞에 버티고 있을 때 오래도록 고급 독자로만 행세하던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쓰기를 하면서 나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그림자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각방을 쓰는 남편이 코를 골며 포화 속에서도 평안히 자고 있을 동안, 사십 오십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밤마다 내리누르는 가위에 숨통이 끊어질 듯 비명을 질러댔다.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제끼고 친구에게 용기내어 고백했다. 아직도 나는 가위에 눌려 홈빡 젖어 발발 떠는 어린 아이라고. 밤마다 그림자를 찾아 헤매고 쫓기는 영혼을 판 가련한 사나이라고. 내 흐트러진 정신세계를 한 문장 한 문장 글로 풀어내니 붕괴 직전의 세상이 차츰 재건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양어깨에 오십견이 오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쳤다. 옷을 입을 때, 샤워를 할 때도 팔은 뇌의 명령어를 거부했다. 고통이 일상 곳곳에 따라다니며 나를 놀려대고 희롱했다. 달갑지 않은 병원 문턱을 넘나들며 하루하루 무기력해져갔다. 수면의 질도 떨어지니 신성했던 일상의 수행능력이 차츰 무너져갔다. 그래, 잠시 멈추자. 이참에 한량이 되어보자. 유투브, 넷플릭스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건져올린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내게 왔다. 지금까지 세 번의 정주행을 하며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의 궤적을 따라갔다. 대사가 거의 없지만 그는 늘 무엇을 말하고 있었다. 매일 커피를 뽑아 먹는 자판기에, 수동 카메라 렌즈에 비친 나뭇잎에, 화장실 새하얀 변기에, 헌책방 문고판 책에,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송에. 들리지 않는 그의 대사에 한마디 한마디 나도 답하고 있었다. 이렇게 삶이 아름다울 줄 몰랐다고. 거룩할 줄 몰랐다고. 마지막 씬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은 울고 웃는다. 나 또한 울고 웃었다.
영화 후반부에 단골 선술집 여사장의 전남편과 히라야마가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는 장면이 있다. 푹 익어가는 두 중년의 남자가 아이처럼 천진하게 서로의 그림자를 쫓고 밟는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무엇을 의미할까. 감독(빔 벤더스)은 이 장면에서 어떤 상징과 의미를 담았을까. 나름 굴려본 개똥철학을 통해 어설프지만 결론을 내려보았다. 잡으려 하면 도망가고 잡았다 싶으면 덧없는 허깨비 같은 그림자인 우리 인생. 우리의 삶도 그러하니 더 이상 하루의 그림자를 쫒지 말고 하루를 살아라. 히라야마와 조카가 돌림노래하듯 읊조린 인생 찬가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인생 영화로 등극한 이 영화를 친구에게 강추했다. 지루하고 단순해서 별 감흥이 없더라는 게 그녀의 중론이었다. 고기 씹듯 두 번 세 번 감상하다 보면 그녀도 땅을 치고 카타르시스에 젖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날부터 시작이다. 우리들의 '퍼펙트 데이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