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갱년기 (1)
넷플릭스는 나의 베프다. 물론 책은 내 조강지처의 권좌를 영원히 지킬 거다. 아무리 바람기 있는 나라도 조강지처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0TT가 애첩으로 자리한지 어언 몇 해인가. 스토리를 워낙 좋아하기에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는 내 일상의 시스템에서 드라마와 영화는 유일한 스토리텔러로 자리잡았다. 신파를 좋아하지 않기에, 즉 '과유불급', 지나친 감정의 거품이 넘쳐 흘러 테이블을 적시기 전에 꿀꺽 흡입한다. 맥주도 그 맛에 마시지 않을까.
특히, <폭싹 속았수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부부를 구현한 드라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킵해왔다. 하지만 끝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구가 감동해서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내가 이렇다) 이를 악물며 보는 내내 생각했다. 이런, 꼭, 현실감 떨어지는 부부들을 아직도 우려먹으며 눈물을 짜게 하는구나. 애순과 관식, 해숙과 낙준. 개뿔이다.
화면 속 그들이 아닌 살아있는 나로 말하자면 25년 결혼 생활에서 10년은 피 터지게 전쟁했고, 보따리를 100번은 쌌겠다. 풀다 싸다하는 동안 열불이 제풀에 지쳐 가라앉기 일쑤였다. 우울증은 하소연으로 털어놔야 치유되는 과정과 비슷하달까. 그럼에도 바위에 달걀치기에 불과한 지난한 전쟁을 치르며 나는 서서히 돌부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남자도 나도 수행의 삶으로 접어들 수밖에.
근교에 제2석굴암, 벽 속에 있는 부처님을 볼 때마다 조금씩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엔 부처님도 샤프한 꽃미남이었으리라.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배도 나오고, 둥글둥글 푸근한 옆집 아저씨의 얼굴이 되어가셨겠지.
어느덧 평생 아웅다웅하며 동거해 온 그 남자의 얼굴선도 무너져가고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곤 했던 날선 인광도 바래간다. 세월 앞에 장사없다더니…. 난 회심의 미소를 남몰래 짓는다.
논리적이고 냉철한 운동권 출신답게 단순, 과격했던 그 남자에게도 갱년기가 왔다. 완경에 접어든 여자처럼 화를 버럭버럭 내고 감정조절을 한동안 못하더니,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제 살길을 찾아가는 것 같다. 봄부터 그 남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외곽에 농막을 뚝딱뚝딱 짓고 밭을 갈고 닭을 키운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아홉 마리의 닭들이 낳아 준 달걀을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농막의 울타리를 두르기 위해 장미를 심은 그 남자에게 로맨틱한 감성도 존재한다는 신선한 발견도 했다. 지난 번에 방문했을 때 벌써 만개한 장미들에 가슴이 괜히 설레기도 했다.
밥상을 거꾸로 앉은 관식이는 못되어도, 환생의 기회를 해숙을 위해 포기한 낙준도 못되지만 (아예 기대조차 안한다. 다시 태어나도. 쩝!) 그 남자는 소위 '츤데레'란 캐릭터를 흔들림 없이 고수해왔다. 음, 자기 캐릭터는 분명하다. 주말도 쉼 없이 농막에 나가 꽃과 식물을 키우고, 닭들을 돌보는 그 남자가 처음엔 낯설었다.
지금까지 살며 보지 못했던 그 남자의 취향과 의지가 생경했다. 평생을 살아도 부부는 서로를 모른다는 말이 수긍도 간다. 내 속에 나를 그 남자는 얼마나 알까. 그도 나도 갱년기를 슬기롭게 건너가기를 소망한다. 어차피 겪을 바에야 피하지 않고 함께 어깨동무하며 한걸음 한걸음 동행하는 것도 멋지다.
허리 굽혀 땀 흘리며 흙 만지길 좋아하고 기르는데 보람을 느끼는 취향이 못되는 것에 통탄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팔 걷어부치고 그 남자와 함께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흐르는 구름을 유유히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