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갱년기 (2)
'세월에 장사없네' 픽 웃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구릿빛 팔뚝을 드러내고 밭에 호스로 물을 대는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여전히. 역시 남자는 강해야 해. 남녀평등을 부르짖었던 젊은 날도 무색해지며 꼰대가 된 나는 그를 향해 흐뭇해했다. 싱싱한 상추와 써니 사이드 업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달걀을 매일 아침 식탁에 올리면서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음, 농막도 쓸만하네. 비록 내가 직접 기르고 먹인 상추와 닭은 아니지만.
처음 닭을 기른다고 할 때 나는 농막에 갈 때마다 닭의 숫자가 맞는지 확인해 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르던 닭을 잡아 먹는 인간은 상종할 수 없다고, 야만적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는 순전히 달걀을 얻기 위해서며 절대로 잡아 먹지 않는다고 거듭 맹세했다.
아홉 마리의 닭. 다행히 그들은 볼 때마다 행복해 보였다. 넓은 닭장(외양간에 버금간다) 안에서 자유로이 활보하며 저만의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물론 나의 착각이며, 자기 합리화일지도)안심하며 나는 그들의 달걀을 약탈해왔다. 고맙단 말은 잊지 않고서.
상추에 갈치 한 점을 얹고 쌈장을 놓고 야무지게 싸서 암팡지게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아이들은 상추에 손도 대지 않았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관상동맥이 안 좋으니 큰 병원 가서 정밀검진을 받아보란다. 나는 상추쌈을 내려놓은 채 그의 얼굴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포즈 뒤에 뭐, 별 거 있겠어? 별 이상 없잖아? 그렇게 마무리했지만 갑자기 연하고 달콤한 상추맛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관상동맥이라… 집안 병력일 수도 있겠구나. 어머님께서 그 쪽이 안 좋다고 하셨으니. 그래도 뭐, 설마 괜찮겠지 하며 남은 상추쌈을 마저 밀어넣었다. 음, 맛있네. 역시 유기농이 최고야.
그로부터 몇 주 뒤 나는 병원 보호자 침대에 누워서 밤을 지새웠다. 스텐트 시술을 한 그는 링거를 몇 개나 꽂은 채 끙끙대며 애처롭게 누워있었다. 혈관 안에 석회도 많고 동맥 경화도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평생 바가지 한 번 긁지 않았던 금연 문제를 꺼냈다. 40년 피웠으면 됐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고마 해라. 흠, 근데 폐암말기 환자도 못 끊는다 했지. 예상대로 그는 바로 짜증을 냈다. 죽고 사는 문젠대도 인간은 이리도 의지박약한 존재인가. 담배란 마약이니 끊긴 힘들겠지. 그래도 환골탈태의 심정으로, 명대로는 살아야 않겠냐는 내 갖은 설득에도 그 남자는 경직된 돌이 되어갔다. 그래, 알아서 해라. 가족이라도 제 인생 각자 관리해야지. 나는 한숨을 쉬었지만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퇴원 이틀 만에 담배를 피우는 그 남자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지만 어떡하랴. 요행을 바랄 수 밖에.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조만간이 되면 좋겠지만, 그 남자가 결단을 내리기를 바랄 뿐이다. 나조차 부끄럽게도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와도 외면해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강한 성벽같이 나를 감싸온 그 남자가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은 살얼음이 끼고 서걱거렸다. 부부는 애증의 관계라는 고리타분한 표현이 비로소 내 심장을 가격했다. 그 남자, 그 여자가 긴긴 애증의 다리를 무사히 건너 무르익은 가을 석양을 바라보며 어느 저녁 된장찌개에 쌍추쌈을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