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의 추억

이열치열, 고통스럽지만 보내기 싫은 싱그러운 하루들

by 백정순

요가는 오래전 철부지적 떠나보낸 풋사랑이었다. 아니, 짝사랑이라고나 할까. 우아하고 슬림한 몸매로 고난도의 동작을 하는 요가인을 동경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낼 것이라는 부러움. 부러움은 끝내 부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한 20년 전 동네 요가원을 찾아갔다. 첫 아이를 낳고 나도 운동이란 걸 해보자며, 그래도 단순한 운동보단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요가가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그 당시엔 예쁘고 몸매 좋은 연예인들이 너도나도 요가를 하고 책을 내고 비디오를 제작, 출시하던 때였다. 그 트렌드를 타고 요가원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요가는 인도에 가서 하는 거라 여기던 관념이 바야흐로 대중화가 되어갔다.

짙은 화장을 한 앙상한 몸매의 아가씨가 원장이라고 상담했다. 바나나 우유와 빵을 끼니로 허겁지겁 때우고 상담 테이블에서 마주한 그녀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가 선생은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다는 푸념을 했다. 앙상한 몸매를 유지해야 회원들이 온다고 했다. 아니, 무슨 영업비밀을 왜 나한테 누설하는 거지. 미심쩍은 마음이 발길을 돌리라고 명했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는 성격상 나는 6개월을 등록해버렸다. (시험 삼아 한 달만 했으면 되었을 걸)


동네 유일한 요가원엔 곧 회원들이 가득 들어찼다. 오전반엔 주로 푸짐한 몸매의 주부들로 열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빼빼 마른 나를 가소롭다는 듯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얼마나 버티겠어, 흥. 그들의 눈초리가 나를 슥 훑었다. 그래, 내 분골쇄신해서 요가의 끝판왕이라는 거꾸로 서기까지 마스터하리라. 이를 악물고 일주일을 버티다 심한 몸살이 났다. 그간 쓰지않던 근육을 무리하게 썼더니 온몸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요가원을 나가지 못한 일주일은 거의 기어다닐 정도로 처참했다. 요가, 우습게 봤더니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네. 원장과 싸우다시피 남은 달을 환불받고 그 후로 요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짝사랑은 아쉬움과 동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도 흐지부지.


아파트 헬스장에서 몇 년간 운동을 하며 커뮤니티에서 운영 중인 요가 프로그램을 흘끗흘끗 엿보기만 했다.

오십견과 목 디스크까지 온 마당에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언젠간…하다 기어이 마음을 먹었다. 몇 차례 연골주사를 맞고 꾸준한 스트레칭으로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오른쪽 팔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유월이 시작되자 요가를 등록해버렸다. 강사에게 내 상태를 설명하니 가능한 동작만 무리하지 않게 하시면 된다고 했다. 이제 요가 두 달째 초보다. 이 더위에 (난 대프리카에 살고 있다) 땀을 됫박 흘리며 요가를 하고 있다. 요가를 하니 운동을 해도 흘린 적이 없던 어마어마한 양의 땀이 비오듯 흐른다.

음, 노폐물과 탁기가 배출되는 거겠지 하며 자위한다. 요가 매트를 말아 옆구리에 끼고 현관문을 나서며 다짐한다. 오늘도 나는 벌쓰기 위해 간다. 한 동작 한 동작 고통을 지그시 참으며 인생은 고통이라 되뇌이며 호흡한다. 고통은 쾌락과 맞물리니 그것이 진리라며 합장한다. 나는 사이비 수행자가 된다. 정말일지도. 이렇게 버티는 힘이 눈곱 만큼씩 쌓여가는 만큼 나 또한 단단해져가리라 씩 웃어본다.


8월에 나 홀로 발리 우붓 휴가를 계획했다. 3주 동안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다가 발리가 요가로 유명하니 나도 요가를 배워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예비단계로 요가를 신청한 속내도 있었다. 혼자서 창피당하느니 좀 배우고 가야겠다고, 몸을 적응시켜 놓아야겠다고. 이열치열 대프리카를 살아내려면 해마다 현명한 계획을 세워야한다. 단지 살아남기보단 단단해질 수 있는 일석이조의 나만의 플랜. 아파트 요가원엔 보기엔 나보다 연배가 높아 보이는 고수가 두 명 있다. 꽤 오래 수련을 해온듯했다. 요가 강사는 가볍게 후려치고도 남을 그들의 내공을 매일 감상하며 부러워하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다. 고통과 즐거움이 씨줄과 날줄로 엮일 때 내 삶도 익어가겠지. 이 열기에 타버려 소진되지 않고, 서서히 익어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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