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니 내 앞엔 돌연 감당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의 승자로 살기위해 무던히 노력해왔기에 우왕좌왕하지 않을 수 있다. 휴일이 와도, 낯선 여행지에서도 그 루틴은 적용된다. 운동, 산책, 공부, 독서, 글쓰기. 단지 이곳에서 빠진 거라면 일과 가사노동이다. 이 두 가지가 빠졌을 뿐인데 나는 무한한 자유의 블랙홀로 빠져버린 거다.
물론 나는 적당한 가사노동과 일을 사랑한다. 내가 규칙, 질서와 조화를 사랑하는 인간임을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온몸으로 느낀다. 일은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가사노동은 (어디까지나 적정한!)나와 가족을 위한 성스러운 임무다. 이 모두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규칙적으로 흘러갈 때 내 행복이 힘들지만 올곧이 유지된다.
하지만 여행에선 이 둘은 제껴둔다. 난 잠시라도 이곳에선 주부도 워킹맘도 아니다. 숙소를 나가 끝없이 펼쳐진 정글과 논을 누비며 아침산책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조금 끄적이고 요가를 한다. 느긋이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무얼 먹어볼까 메뉴판을 열심히 마주하는 일도 하루의 즐거움이다. 음식은 저렴하고 맛있다. 가급적이면 로컬 음식을 먹는다. 여유롭게 점심을 먹은 후 동네를 걷는다. 햇살이 따가워지지만 온통 누워있는 개들과 사람들을 보는 재미를 하루라도 놓칠 수 없다.
어느새 그 풍경에 정이 들어간다. 집집마다 조그만 사원이 있고 신비로운 향을 피운다. 제단위에 바친 꽃과 향초가 순박하고 정갈한 발리인 그 자체다.
숙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마사지를 받았다. 한 시간 동안 정성스러운 손길에 몸 구석구석이 황홀하게 릴렉스된다. 너무 감사해서 팁을 후하게 드리고자 했지만 현금이 부족해 성의만 표시했다. 오후엔 주로 넷플릭스를 보고 독서를 한다. 한낮이 지나고 서서히 오후가 익어가면 윗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간다. 파란하늘, 구름, 그 아래로 일렁이는 푸릇푸릇한 논과 정글의 바다를 굽어보며 한바탕 헤엄친다. 오십견과 목디스크로 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매일 호사를 누린다.
닭 울음에 깨고 윙윙대는 풀벌레와 모기의 날개짓에 노곤히 잠든다. 때때로 방문하는 도마뱀 친구 덕분에 난 외로움을 느낄 여유도 없다.
#발리 #우붓 #나홀로여행 #루틴 #힐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