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무는 깡 시골 동네엔 마트도, 환전소도, ATM 도 없다. 아, 이런 이런. 현금이 필요하다. 발리에서 신용카드로 계산하면 3 퍼센트의 수수료가 붙는다. 이 시골 식당에서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 10 퍼센트의 봉사료가 부가되는 판에 수수료까지... 이건 아니지.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번 주말마다 우붓 시내 관광도 할 겸 현금도 인출할 겸 외출했다. 처음으로 고젝 바이크를 호출했다. 바이크가 택시보다 저렴하다는 데 혹했다. 5분 내에 도착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로부터 40분 뒤에 나는 바이크 뒤에 탑승했다. 출발부터 우붓의 교통 지옥은 시작된다. 여기선 느긋해져야겠군. 쓸개와 내장 아니, 뇌를 비워야겠군. 성미 급한 한국인의 기질을 억눌러야한다.
난생 처음 오토바이가 아니라 스쿠터 뒷자석에 올랐다. 엉덩이를 걸치고 드라이버의 옆구리를 꽉 잡았다. 좁고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길을 요리조리 쌩쌩 달리는 내내 내 간은 빠짝 졸아들었다. 아직 간을 못 비웠군. 아, 여기서 사고가 나 내 남은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호들갑으로 가슴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봐요, 젊은이. 빨리 안 가도 돼요. 나 오토바이 처음이라구. 무서워 죽겠어요. 이렇게 외쳐도 드라이버는 고개만 까딱할 뿐 저만 헬멧을 쓴 채 묵묵부답이다. 눈을 감자, 차라리. 눈을 감으니 더 무서웠다. 그래도 죽어도 알고서나 죽는 게 낫지. 눈을 뜨니 서서히 우붓의 마을, 사람들, 하늘로 치솟은 반얀트리와 어우러진 사원들의 향내가 코끝을 맴돌며 나는 어느새 총알 스쿠터를 즐긴다. 스피드로 날아가도 30분은 걸리는 우붓 센터에 도착.
우붓 도심은 그야말로 헬이었다. 8월은 건기 성수기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난다. 인도는 거의 없는 좁디좁은 2차선 도로를 스쿠터와 택시가 통조림처럼 꽉 채운다.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쇼윈도에 바짝 붙어 걸어간다. 우붓 도심에서 유럽처럼 한적하고 낭만적인 거리를 산책하고픈 바램은 버리는 게 좋다.
그건 내가 머무는 시골 동네도 마찬가지다. 빌라 뒤편으로 올라가면 펼쳐지는 논과 정글 길을 제외하곤 동네도 여유롭게 걸어다니기 힘들다. 가만히 보니 걸어다니는 존재는 노인, 아이들, 개들 그리고 나 뿐이다. 보행자보다 스쿠터가 더 많다. 이곳에선 1인 1스쿠터, 스쿠터가 발인 셈이다. 외국인 관광객 조차도 스쿠터를 대여해 황야의 무법자가 되어 온 발리를 누빈다. 산책을 하다가도 등 뒤로 스쿠터 소리가 들려오면 논 둔덕으로 뛰어 오르거나 코코넛 나무 둥치에 납작 붙었다. 악명 높은 우붓의 교통 지옥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나는 늘 긴장했다.
시간이 가니 이 교통 지옥도 적응이 되어가고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붓 왕궁을 돌아보고 시장에 들어선다. 태생적으로 흥정을 못 하는 나는 티셔츠 두 벌을 바가지를 쓰며 산다. 내 얼굴엔 누가 봐도 '호구 '라 쓰여있다. 반에 반값은 후려쳐야 된다는데 두 배 이상의 값을 주고 사다니. 나이가 들어서도 바보는 바보구나. 이를 갈다가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 여기 돈 아끼러 온 거 아니잖아. 돈 쓰러 온 거잖아. 여행왔다고. 그래봤자 한국보다 싼 데 왜 이리 못나게 굴지. 항상 뒷북치는 내 이 못난 모습도 그냥 귀엽게 받아들이자.
흥정도 삶의 기술이다. 어릴 때 엄마 손잡고 시장에 갈 때면 거침없이 흥정해대는 엄마를 보고 몰래 떨곤했던 겁쟁이였다. 세상과 맞서고 당차게 나아가는 엄마를 닮고 싶었지만 끝내 이 부분은 극복되지 않는다. 안 되는 건 포기하는 것도 아니,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기술일 것이리라 합리화해본다.
바가지를 쓰더라도 그들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노라면 금새 풀린다. 발리인은 늘 소박하면서도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 있다. 생의 열정이 넘치는 시장의 미로를 헤매이며 시들시들하던 나도 오랜만에 피어난다. 푸근해진다. 여행객 모드에서 잠시 현지인 모드로의 전환이 소기의 목적이었기에 이러한 설렘에 나는 들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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