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예측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종종 미래를 내다볼 때가 있다. 다들 어떠한 초능력을 부여받은 건 아니지만 살아감으로써, 살기 위해서 그러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나큰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전 벌레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대피를 한다. 또 우리들은 그런 동물들을 보며 그런 위기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변수와 함정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면 그런 예측과 습관적인 일상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그려놓고 실행에 옮길 준비를 미리 해놓는다. 물론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순응해주지 않다는 것도 살아감으로써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은 더더욱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다. 오히려 그래서 예측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것을 걱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걱정이라는 단어 앞에 쓸데없는 이란 말을 붙이기도 한다. 쓸데없는 걱정.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상한 후 누군가에게 이해하게끔 전달을 하면 그 누군가는 너무 걱정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 이렇게 마주하고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을 대화하자고…. 사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흘러가고 있는 지금을 느끼고 숨을 쉬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기록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기록이란 지나온 과거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파악해서 기록해놔야 하기도 한다. 나는 역사적이고 살아있는 형태 이외의 것까진 기록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본인의 인생 정도는 스스로 기억하고 기록할 의무는 가지고 있다. 그것이 추억이던지, 걱정이던지, 편지이던지, 언어이던지 말이다.
무언가를 예측한다는 건 (쓸데없는)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그 (쓸데없는) 감정을 소모해보려 한다. 지금 생각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바뀐다는 건 마치 한 몸에 두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는 거랑 비슷하다. 그 과정을 설명하기란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자로는 표현하기 힘들 수도 있다. 아니면 아직 내가 표현하는 법을 모를 수도 있다.(알고 있지만 안 하는 걸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설명한다는 건 어떤 말로도 벅차오른다. 어쩌면 표현을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설명한다는 건 (나의 경우) 쉬운 편에 속한다. 무슨 무용담처럼 떠들어 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들한테는 경우에 따라 진솔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생각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답답했던 속이 뚫리는 느낌도 안 든다. 마치 통화 부재 시 자동응답기같이 레퍼토리가 생기면서 내 몸 어딘가에 굳은살로 배겨있을 뿐이다.(단 믿을만한 사람한테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사랑했던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을 예측한다는 건 사유 불문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다. 건들기 싫어서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놓아두었던 불안정한 사랑들이 외로움을 못 참고 내 몸에 있는 모든 틈을 타고 도망치려 하고 있다. 내 몸에서 그것들이 하나, 둘 세어 나가는 순간 내가 그동안 쌓아뒀던 예측의 탑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끝내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분명 다시 쌓아올릴 방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패닉 상태가 되기 시작하면 모든 의욕이 상실되고 불안정한 사랑들이 떠난 자리엔 몸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 찬 바람이 들어와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 더군다나 불안정한 사랑들이 세어 나가면서 남기고 간 외로움은 온몸 곳곳에 머물며 나의 시야와 자리를 갉아먹는다. 그것들이 몸 안에서 전부 빼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빠져나가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아마 불안정한 사랑들이 내 몸 구석에 머물러 있었던 만큼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중립적인 시간만이 나의 몸 상태를 어떤 것보다 객관적이게 평가해주고 충분한 호흡을 했을 때 서서히 외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 차렸을 땐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예측의 탑에서 도망치고 없다. 이때만큼은 그 예측의 탑들이 쓸데없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마 불안함을 다시 감추고 살아가기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 예측이 든다.
살아감으로써, 살기 위해선 아예 걱정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내일의 걱정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내일의 걱정을 한다는 건 사랑보다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