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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morebi Dec 13.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즘에 나의 은사님이 강의시간에 해준 말이었다. 그때 당시 학생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하며 공감을 전하고 있었지만 나는 남들 몰래 인상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 살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기도 할 테고, 사랑도, 일도 안 풀릴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새기며 긍정적인 메타포를 심으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것이 현실을 도피하기만 하는 '자기 위로'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해진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해결방법을 찾는 냉정함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해결방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길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기억에 제일 오래 남았던 문장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게 다시 그 문장의 메타포를 찾고 있다. 힘들 때마다, 생각대로 잘 안 풀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금도 공감이 되는 문장은 아니다. 4년 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최근 들어 내가 왜 이 문장이 다시 생각나고 중얼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메일함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필요한 건 놔두고 스팸이나 홍보성 메일은 그때마다 지우는 버릇이 있다. 쌓여있는 숫자를 보기가 싫은 것도 있지만 보관하고 싶은 메일을 쉽게 꺼내보기 위해서 정리하는 이유도 있다. 최근에 우연히 보관하고 있는 메일들을 다시 꺼내봤는데 지우고는 싶지만 망설였던 메일들을 봤다. 처음에는 못 본척하고 뒤로 가기를 눌렀지만 도피성 백스페이스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다시 메일함을 열었다. 도피는 하지 않았지만 그 메일들을 오히려 꼼꼼하게 읽어봤다.


 최근 들어 사용하고 있는 아이맥이 부팅속도가 느려졌다. 데이터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묵혀뒀던 음악 작업물과 영상들을 꺼내봤다. 필요 없는 것들은 지우고 보관용 파일들은 외장하드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언젠간 사용할 줄만 알았던 음악 작업 파일과 영상들을 발견했다. 지금은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필요하든 안 하든 데이터로서 존재하면 안 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더욱더 데이터화 시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며칠간 나는 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투성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현실이 침묵하니까 꿈만 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살고 있는 나이기 때문에 믿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사실 믿고 자시고 침묵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다. 소리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솔직해지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에도 나의 젊음의 예기는 계속될 것 같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은 현실을 도피하는 게 아닌 현실을 인지하고 실천해가는 문장인 거 같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맞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치 물러서서 주위를 돌고 돌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태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는 올해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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