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lf life
네가 무심히 건넨 질문 한 마디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 하루가 소멸해버리는 새벽이 되면 그 한 마디에 하루를 살아가는 내 자신이 문득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으로 나는 새벽을 보낼 수 있게 됐어. 그런 새벽에 이렇게 외로운 글을 쓰고 있어.
우리의 관계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얼마나 될까 짐작을 해봤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했어.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기한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어. 적어도 그 기한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정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알 수 있는 건 무기한은 없단 사실이었어. 그리고 유통기한이 다 지난 후에야 유통기한이 지났단 걸 알 수 있었어. 상해버린 마음은 더 이상 복구가 안됐고, 나는 구취가 가득한 생각을 가지고 더 썩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생각이 든 건 유통기한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왜 벌써 상해버린 건지 아쉬운 마음이 커. 미련이 있거나 하진 않아. 조금만 더 보관하고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면 뭔가 달라지진 않았을까. 후회나 미련이 있어서 상상한 게 아니라 지금을 알아가는 과정이야. 내가 몰랐던 기한을 알기 시작했고, 우리에겐 유통기한만 기한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 유통기한이 끝난 후에 다른 기한이 있단 걸 알았고 그 시간엔 우리가 없는 또 다른 감정이 들어있단 걸 알았어. 서로의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의 기한이 있었고 너의 시간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지금 나의 기한도 끝났어.
우리는 앞으로 다 쓴 건 버리거나 어딘가로 떠다니거나 집 안 어딘가에 먼지를 시간 삼아 모래시계를 쌓아가겠지. 이건 온전한 내 생각이야. 내 생각과 달리 너는 매일매일 우리의 시간을 돌리려 할 수도 있겠지만 너는 가격표를 떼지 않은 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을 거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내 눈에 보이지 않아. 우린 이제 서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었어. 우리의 관계는 이미 시들었고 아무 향기도 남지 않았어. 실제로는 그래. 하지만 가끔 어디선가 비슷한 향기가 나면 그때를 떠올리겠지. 그렇게 떠올리기만 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자. 유통기한은 지났어도 할 말은 많아지는 일은 꿈속에서만 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