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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저격 사건

1908년 3월 23일, 미국

by 훙훙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교고문으로서 대한제국에 대한 조언을 하는 대신, 일본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대한제국의 이권을 넘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애초에 스티븐스는 1882년, 일본에서 외교관일을 처음 시작했고 훗날 일본 외무성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던 대표적인 친일파였습니다.

DurhamWhiteStevens.jpg 일본인 보다도 일본을 사랑한 스티븐스


스티븐스는 이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던 중 일본의 요청으로 대한제국으로 건너와 활동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취임한 것도 일본이 대한제국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스티븐스는 처음부터 대한제국의 외교에 조언을 해 줄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일본은 대미 외교 창구로 스티븐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스티븐스는 이에 호응해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를 미국 정가에 계속해서 유포합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이었음에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찬동, 추진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내에서 친일적인 여론 조성을 위해 힘쓰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스티븐스는 을사조약 체결을 지지하는 인터뷰를 지속적으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심지어는 대한제국의 민중들이 일본의 지배를 원하고 있고, 일본은 진심으로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이에 대해 재미 한국인들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스티븐스를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스티븐스는 한국인들에게 일본 덕분에 잘살게 된 주제에 적반하장이라며 적반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일부 한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격분한 한인들이 한인 공동체에 돌아가 스티븐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스티븐스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지원 아래에 미국에서의 여론전을 계속했습니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역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스티븐스를 쫒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던 전명운 의사로, 준비한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총이 불발되자 권총의 개머리판으로 스티븐스를 공격하고 둘 사이에는 육탄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장인환 의사가 나타나 스티븐스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합니다.

50100711204544(0).JPG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신문.(야! 신난다!)



두 발은 스티븐스를 관통하였고, 한 발은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전명운 의사의 팔에 부상을 입히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그 자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하게 됩니다.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는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인사회에서는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승만에게 변호를 부탁하였으나, 이승만은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살인범을 변호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게 됩니다. 결국 전명운 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되었고, 장인환 의사는 25년형이 구형되었으나, 장인환 의사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사건임을 참작하여 10년으로 감형되게 됩니다.

전명운 의사는 훗날 미국으로 귀화하였고, 장인환 의사는 1919년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1930년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monthlyp_2011032516243335.jpg 전명운 의사
장인환__chang_chun02.png 장인환 의사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는 사전 모의 없이 완전한 우연으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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