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드라마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와, 여기 하늘 맛집이네”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껴 오로지 ‘쉼’을 위해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메고 길을 나선 주인공(여름)은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마을, 오래도록 비워둔 낡고 더러운 건물 안에 머무르게 된다. 덜컹 거리는 창문, 구멍이 숭숭 난 천장, 불빛 하나 없이 낡은 소파 하나만 덜렁 놓인 곳.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여름이가 조금만 힘을 줘도 툭 떨어질 것 같은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와, 여기 하늘 맛집이네”라고.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거의 누운 자세로 널브러져 새우깡을 우걱우걱 입안에 넣다 주인공의 말에 벌떡 일어나 다리를 내리고 화면을 정시시켰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다시 그 장면을 보았다. 한 번 더 보았다. 주인공의 말과 표정이, 화면을 채운 하늘이 너무 예뻐서 괜히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런 말들이 있다. 별거 아닌데 내것은 아닌 말. 내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갖고 싶은 말. 여름이의 말이 그랬다.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휴대폰을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워 조용히 여름이의 말을 따라 해 보았다. “와, 여. 기. 하. 늘. 맛. 집. 이. 네.”
참, 예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불행들, 흔히 ‘상처’라 불리는 것을 가득 들고서도 ‘사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말. 언제고 다시 다정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말. 씩씩한 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할 수 있는 건, 도망가지는 않겠단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살겠다는 말, 결국엔 살아 보겠다는 말이라서 좋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여름이의 말을 가슴이 뭉근해질 때까지 따라 했는지 모른다.
불행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난폭한 삶에 휩쓸려 가지 않게 스스로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의 그림자는 자주 기댈 곳 마저 함께 빼앗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내가 사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내 불행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내가 가진 불행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게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럼 모든 게 다 똑같이 어둠 속으로 내려앉았다. 그만큼 내 슬픔도 더 짙은 색을 띠었다.
내게는 여름이와 같은 말이 없었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가진 불행과 고통, 외로움과 슬픔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골몰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인 나를 가감 없이 마주하는 일, 그게 나를 일으켜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엔 음습하고 선득한 말들이 자라났다. 나는 그 말을 먹고, 그 말도 나를 먹었다. 그렇게 나는 삶에서 더 멀어졌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는 길, 커다란 트랙터를 실은 대형트럭 두 대가 30킬로도 되지 않는 속도로 느릿느릿 앞 길을 막았다. 마주 오는 차가 없어 추월을 할까 하다 시계를 보곤 그냥 천천히 트럭 뒤를 쫓았다. 창문을 조금 내리고 한적한 마을을 보며 생각했다. “음, 여기는 풍경 맛집이네”하고. 풍경 맛집을 매일 오가니 곧 “풍경부자가 되겠군”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동네 산책을 나온 누렁이보다도 느린 속도로 달리면서도 상쾌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한 번쯤은 여름이처럼 예쁜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어떤 다짐을 한 건지는. 이유야 어찌 됐던 삶의 부스러기들이 조금은 떨어져 나간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그 말을 떠올린 내가 좋아서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올렸다. 괜히 웃음이 나왔고, 조금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