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열둘, 열셋이 된 첫째와 둘째에게 얼마 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하고 유순한 첫째의 얼굴엔 억울함이라 불리는 그늘이 드리웠고, 똑 부러지고 자기주장이 강한 둘째의 입에선 '다다다다' 날 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쉼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보지만, 어느새 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거친 숨을 쉬며 아이들 앞에 서있다. 이른바 '대치' 상태.
동생들의 장난질과 악다구니, 혹은 막무가내 우기기 (내가 언제?) 속에서 버텨야 하는 첫째의 고되고 서러운 얼굴 앞에 서면 나는 바짝 쪼그라든다. 연년생 동생 셋을 안겨준 것이 어쩐지 혼자 들기엔 버거운 커다란 짐 꾸러미를 아이의 어깨 위에 얹어 놓은 것만 같아 한 없이 미안해져서다. 하지만 그런 마음뒤엔, 그래도 '네가 형이니까, 오빠니까, 첫째니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와 '제발 너라도 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당부와 바람들을 아이 앞에 쏟아내고 만다. 위로와 공감을 바라고 왔을 아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채워주는 게 쉽지가 않다. 결국 또르륵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첫째를 볼 때면 나도 같이 울고만 싶다.
그러나 내겐 슬픔에 빠질 여유가 없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이 넘쳐나는 둘째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 엄마, 왜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 엄마 내 말 듣고 있어? 엄마, 내 옷 아직도 안 빨았어?, 건조기는 왜 안 돌려?로 시작해서 한참을 달리다 보면 결국, '아이씨와 짜증나'로 끝나고 마는 목소리.
평행선을 달리다 총제적 난국이 되어 버리는 싸움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 스톱을 외쳐 보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는다. 이상한 표정으로, 삐뚜름한 몸으로, 쿵쾅 거리는 발소리고, 긴 머리를 박박 빗어 재끼는 분노의 빗질로, 뒤돌아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바닥이 다 드러난 내 인내심에 기꺼이 작은 불씨를 떨어트린다.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것 만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 이른바 '전쟁'에 돌입하고 마는 거다.
아이는 한 발 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간 읽은 책과 주워들은 이야기, 학교에서 배운 온갖 것들을 끌어와 나를 공격한다.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 맞는 말만 한다. 오로지 논리와 이성에 기대서. 나도 최선을 다한다.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는 해결할 수 있는 일 보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아이때문에 무너지는 건, 언제나 긴 싸움이 끝난 후 휴전상태로 들어갔을 때다. 가시를 세우고 못되게 달려들던 아이는 꼭 휴전상태를 틈타 내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책상 위에 끔찍이 아끼는 스티커를 잔뜩 올려놓고 가거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가족모두에게 굿 나이트 인사를 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물어보면서 일상의 대화를 유도하는 것으로.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은 내 마음은, 슬쩍 건넨 아이의 마음 앞에서 괜스레 부끄럽다. 그것이 진짜 화해의 제스처인지, 엄마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제 처지에 대한 방어기제 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자주 부끄럽고 모자란 사람이 된다.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눈물이 흘러서 조금 울었다. 아이들 잠옷과 읽던 책, 끌고 나온 이불로 이미 초토화된 거실과 다르지 않은 내 마음은 누가 알아주나 싶어 서러움이 밀려왔다. 털래털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을 땐,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소멸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동.
길었던 육아기를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던때, 막연하지만 간절하게 상상했던 공간이 있었다. 도리스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처럼, 나만의 19호실을 꿈꿨다. 육아와 살림의 흔적이 없는 낯설고 조용한 공간. 하지만, 소설처럼 혼자 모텔을 드나들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상상만 하다 끝났었다. 이후엔, 때때로 용기가 나질 않아 19호실로 향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겼다. 만일 그때, 어떤 방으로 나를 숨겼다면 단언컨대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쪽으로 흘렀을 거다. 다행히 책과 사람을 선택해, 집 안에서도 안정된 호흡을 찾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내 머리에 오늘 떠오른 것이 나만의 19호실이었다. 물론 우울의 바닥을 찍었던 그때와는 다른 느낌의 19호실이지만, 그런 공간이 절실했다. 모두가 빠져나간 곳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만 존재할 수 있는 곳. 오로지 나의 호흡만 존재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가 원할 때만 열어둘 수 있는 그런 곳.
사춘기가 불리는 터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아이를 보면서 나는 여전히 내 살 궁리를 한다. 내가 숨 쉴 구멍, 내가 쉴 틈, 내가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상상한다. 나도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이가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하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아이 곁에서 살아남고 싶다.
그래서 상상해 본다. 영화 <마나나의 가출>에 나오는 그녀의 테라스 처럼, 커다란 창문과 햇살,바람, 낡은 패브릭 쇼파와, 음악과 책만이 존재하는 낯설지만 편안한 공간을.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갖게 될지도 모를 지극히 사적인 나만의 공간. 오늘은 그렇게나마 어지러진 마음을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