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어머니 이야기.

어머니는 언제쯤 나의 안부를 궁금해 하실까.

by 고운

남편이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놓은 양말이나, 뚜껑을 닫아 놓지 않은 쉐이빙 크림이 허연 거품을 토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그가 던져놓은 양말이나 뒤 처리가 안 된 흔적들을 모두 찍어 어머니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아들이 이런 사소한 것조차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다. 물론 어머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루 종일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아들이 그런 것까지 챙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테니까. 언젠가 1년에 한 번 꼴로 지갑을 잃어버리고, 한 두 번은 꼭 넘어져 다치거나, 발목을 접질리는 남편의 덤벙거림에 대해 어머니에게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되려 네가 잘 챙기라는 잔소리만 들었던 적이 있다. 딱히 남편 흉을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대화중에 나온 이야기였는데도 어머니는 그런 내가 퍽이나 못마땅하셨나 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던 남편은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줬던 믿음직한 자식 하나,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흔하지만 특별한 그런 스토리가 어머니와 남편의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런 아들이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접고 촌에 내려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남편은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고, 나는 어머니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서 아들을 믿어주길 호소했다. 남편의 농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과수원 앞 차도에서 가두판매를 하시던 어머니는 손님들이 올 때마다 작업복 차림으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던 아들을 변호하기 바빴다. 야가 원래는 서울에서 대학 나오고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하던 아지, 여기 이러고 있을 아가 아니라고.


손님이 묻기도 전에 해명하듯 어머니 입에서 먼저 튀어나오는 그 말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에 대한 변호와 자랑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어머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편을 치켜세우는 말을 할라 치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옮기곤 했다. 귀가 닳도록 들어서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부풀대로 부푼 풍선 같았다. 어머니는 그 풍선을 손에 쥐고 하늘을 둥둥 떠다니셨다.



첫 아이를 낳고 처음 유모차에 태워 동네 산책을 나갔을 때, 동네 어르신들이 아기를 보고 나를 닮았다고,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봤자 야는 '유'씨가 아니라 '송'씨라고. 경악, 그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엄마 같은 시어머니, 딸 같은 며느리를 꿈꿔본 적은 없지만 너무 한다 싶었다.


성격상 살가운 며느리는 못 되지만 내 나름의 노력은 했었다. 매번 생신상을 직접 차려드리고, 여름이면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과수원으로, 가게로 날랐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고기를 볶고, 찌개를 끓여 들고 갔다. 어머니 환갑 때는 백일이 된 아기를 업고 20인분의 상을 차려 우리 집에서 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려 드렸다. 곰솥에 미역국을 끓이고, 더덕을 두드려 굽고, 잡채를 하고, 월남쌈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치우는 것까지 혼자 해냈다. 해드리고 싶었다. 농사를 짓겠다는 아들 옆에서 어머니도 함께 고생하고 계신 걸 알아서, 아들을 위해 어머니의 삶 일 부분을 내어주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라도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 소용없는 일이었나 보다. 막내가 어린이집에 간 뒤로 농사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나를 보고 못 본 체 하셨다. 음료와 샌드위치를 들고 가면 입도 대지 않으셨고, 인사를 하지도 받지도 않으셨다. 할머니 집에 놀러 간 아이들을 데리러 갔던 날엔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 티브이에 빠진 큰 아이들이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막내가 까치발을 하고 문을 열겠다고 낑낑 거리는 대도 어머니는 끝까지 모른 척 침대에 누워 계셨다. 3~4분,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나를 휘저었던 수치심의 조각이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있다.


이제 더는 어머니의 생신상을 직접 차리지 않는다. 어머니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도, 생신이나 크리스마스에 썼던 짧은 편지도 쓰지 않는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식당을 예약하고, 어버이날이나 생신 날이면 봉투에 용돈을 넣어 드리는 것이 전부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이 더는 생기지 않는 탓이다.


어머니의 손엔 아직도 아들이 만들어준 커다란 풍선이 들려있다. 그래서 뭘 하든,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순한 어머니의 아들이 된다. 지금도 내 입에서 남편을 향한 사소한 트집이라도 나올라 치면 어머니의 얼굴은 금세 굳어져버린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두 아들은(남편의 동생까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가끔씩 날 모른 척하고, 내 말에 응답하지 않는 것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당신의 아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귀한 자식이라는 걸 어머니는 정말 모르시는 걸까. 아들과 손주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만 내게 떼어 주셔도 좋을 텐데. 나는 늘 송 씨들을 챙기는 유 씨, 그저 송 씨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밥을 하고 살림을 하는 사람이 되어 어머니 앞에 서야 할 때면 한 없이 위축되는 마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날 향한 어머니의 뾰족한 마음을 느낄 때면, 난 빨래건조대에 걸린 송 씨들의 옷가지를 보는 것 만으로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들이 벗어놓은 양말이나 던져둔 수건 따위를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른다. 눈에 보이는 송 씨들의 모든 행동이 거슬리는 거다.


“똑똑하면 뭐해, 정리정돈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공부 잘하는 게 뭐 대수니. 자기 돌봄이 안되면 어떻게 살래. 엄마가 평생 니들 곁에 있어줄 거 같아? 엄마 죽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도대체!”


실은 남편에게, 더 솔직하게는 어머니 앞에서 하고 싶은 소리를 아이들에게 하는 척, 사납게 소리를 지르고 거실에 늘어놓은 것들을 발로 툭툭 치고 다니며 다섯 명의 송 씨를 차례로 노려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제야 슬슬 눈치를 보며 몸을 움직이는 송 씨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오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한 숨만 푹푹 새어 나온다.


백 점짜리 아들이라고 백 점짜리 남편이나 아빠가 되지 않는다. 아들과 남편과 아빠의 자리는 너무도 다르니까.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의 삶이 그 자체로 훌륭할 순 있어도 모두에게 정답이 될 순 없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힘들게 살아온 당신의 삶을 앞세워 나는 무얼 해도 집안에 들어앉은 팔자 좋은 며느리 취급을 한다. 내가 당신만큼 당신의 아들을 위해주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손주들의 똘똘함은 내가 아닌 당신의 아들을 닮아서라고 늘 강조하듯 말씀하신다. 당신의 아들이 밭에서 땀 흘려 일하듯 내가 송 씨들의 정돈된 삶을 위해 집 안에서 흘리는 땀은 알지 못하시나 보다.


앞으로 어머니는 몇 번이나 더 나를 모른 체하실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나를 향한 뾰족한 눈빛이 조금은 수 그러 들까. 경악과 체념을 수 없이 오가면서도, 한 번쯤은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길 나는 왜 아직도 기다리고 있나.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구나, 밥은 잘 챙겨 먹니’ 그런 말 한 번 들어보면 그동안 쌓인 서운함이 다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데,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의 밥을 걱정하느라 나 같은 건 돌아볼 새가 없으신 것 같다.


그래, 다 좋다. 하지만 당신의 백 점짜리 아들이 어딜 가도 항상 백 점짜리 인간은 아니라는 걸 제발 좀 아셨으면 좋겠다. 내 속을 박박 긁는 날도 있고, 애들에게 진상을 부리는 날도 있고, 지 힘들다고 온갖 짜증 다 내는 날도 있다는 거. 어머니 눈에 부족하기만 한 나처럼, 당신의 아들이나 나나 실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 부족한 인간 둘이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럼 거실 바닥에 던져놓은 송 씨들의 옷가지를 보고도 휘휘 휘파람을 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