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계절은 아직도 봄.

당신 덕에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

by 고운


스물넷 겨울, 노량진 학원가에 위치한 지하 술집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봄 꽃이 필 무렵 부는 ‘꽃바람’ 같았다. 단정한 얼굴에 가득 담긴 미소가 그랬다. 편안하고 따뜻해 보였다. 몇 번을 더 만나고 연애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첫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성실했고, 잘 웃었다. 당시 깊은 우울과 불안에 놓여 있던 난, 매일 밤 흐트러짐 없이 웃는 얼굴로 날 찾아오던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웃는 날이 조금씩 늘어 갔다. 건장한 서른 살의 성인 남자를 보며 ‘꽃’을 떠올린 다는 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 그는 정말, 봄 햇살을 받고 막 피어난 꽃 같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 그가 건넨 다정한 마음들이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도 꽃 한 송이가 피어날 것만 같았다. 엄청나게 뜨겁거나 굉장하게 로맨틱하지 않은 이유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그를 사랑했다.


스물일곱, 2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한 집에 살게 되었을 때, 그는 그냥 ‘바람’이 되었다. 우린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귀농 생활을 했는데 땅을 사고, 밭을 일구고, 농사를 배우고 익히느라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네 명의 아이를 낳아 정신없는 육아기를 보냈다. 새벽같이 나가 늦은 밤이 돼야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은 매일을 그렇게 바람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되었다. 살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외로웠다. 치열했던 육아기, 남편의 빈자리는 그렇게 서늘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서른셋, 시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내게 농사를 강요하면서 삶에 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견디다 보면 환멸이 들었다. 그의 곁에서라면 캄캄한 내 삶 한편에도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예상 밖의 일에 내 마음은 전 보다 더 뾰족해져 버렸다. 날 선 표정과 말을 더는 숨기지 못하게 됐을 땐, 우리의 마음 안에 서로를 집어삼킬 듯 한 ‘돌개(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단정했던 그의 얼굴은 푹 꺼진 쿠션처럼 자꾸만 구겨졌고, 봄날의 꽃을 피우길 바라던 내 마음엔 푸석한 먼지만 일었다. 서로의 하루를 나누며 시작한 대화는 자주 다툼으로 끝이 났다. 나는 방에서 그는 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동안은 그렇게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지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그를, 그가 나를 서로에게서 밀어내게 될까 조금은 두렵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깊은 불안에 빠졌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불안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엔 내 앞에 놓인 삶이,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나를 불안하게 했지만 다시 찾아온 불안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불안이었다. 그의 곁에서 나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거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내 안에 불어넣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바람을. 그 바람을 타고 어두운 밤을 건넜던 시간들을.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내게 충분한 것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석했던 마음에 시원한 소나기가 내렸다. 나는 뿌옇게 흐려졌던 마음을 닦아내고 다시 한번 꽃을 피울 준비를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밤, 함께 산책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읽은 책이나, 나의 아줌마 친구들과 나누었던 재미난 이야기, 아이들과 보낸 시간을 꺼내어 놓고, 그는 함께 농사를 짓는 친구들과 나눈 소소한 대화나, 오늘 먹은 점심, 주식이나 웹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고, 때론 등을 보이기 전에 한 발 물러나야 하는 적절한 때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는 지금도,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웃음을 내게 보인다. 그리고 난, 그의 웃음을 보며 오래전 그날처럼 깊은 위로를 받는다. 물론 지금도 종종 돌개바람이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날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순간 날 향해 웃어주는 그의 웃음이 있어 우리의 계절은 아직도 봄에 머물러 있다.


나에게 봄을 선물해준 사람, 당신 덕에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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