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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l 23. 2022

반가워, 초록이들아!

초록이와 함께 하는 삶.

결혼 전, 저녁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서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가 보이지 않아 늘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럼 엄마는 쪼그려 앉아 길가에 핀 작은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허리를 굽혀 산책로에 떨어진 낙엽을 줍고 있었다.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면 엄마는 또박또박 ‘먼저 가’라는 말을 입으로 그려 보였다. 운동하자고 나와선, 걸음을 뗄 때마다 마주치는 꽃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엄마를 보면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몰라 괜히 심술이 나곤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손목을 잡아당기며 재촉할 때까지 단풍나무 주변을 한참이나 맴돌았다.      


결혼 후 작을 시골마을로 귀촌한 부모님 댁을 방문하면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기는 건 엄마의 작은 정원이었다. 반질반질한 항아리들 주변으로 수국, 라일락, 패랭이, 데이지, 장미, 채송화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해가 잘 드는 데크 위엔 통통하고 앙증맞은 다육식물들이, 살짝 그늘이 진 마당 코너에는 생동감 넘치게 휘어진 잎이 매력인 열대식물이 줄지어 있었다. 식물의 종류에 따라 들여야 하는 정성이 다 다를 텐데, 엄마의 정원에 있는 것들은 저마다 넘치는 생명력을 뿜어댔다. 반면, 엄마의 얼굴은 매일 밤낮으로 정원을 관리하느라 까맣게 그을렸고, 햇볕에 등을 지고 앉아 분갈이와 가지치기 따위를 하느라 주름진 손등은 말할 것도 없이 더 거칠해졌다. 저것들이 뭐라고 저렇게 정성을 쏟는지, 나는 단풍나무 앞을 서성이던 엄마의 손목을 잡아챌 때처럼 또 한 번 심술이 났다.

     

“엄마, 그냥 조금만 키우면 안 돼? 이게 다 뭐야, 너무 많으니까 오히려 안 이뻐. 저 앞집 좀 봐. 그냥 나무 몇 그루에 잔디만 있으니까 얼마나 깨끗하고 좋아. 나는 이거 다 없애 버렸으면 좋겠어. 진짜 별로야.” - 지금 생각하면 못된 말을 참 아무렇지 않게 했다 싶다. 게다가 우리 집도 아니고 엄마 집인데, 내가 대신 키워주는 것도 아니고, 꽃 한 송이 사다 준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땐 몰랐다. 작은 꽃들에게 엄마가 받았을 기쁨이나 위로 같은 것들을.




결혼 초 신혼집에 커다란 화분 두 개를 들여놨었다. 식물을 좋아해서라기 보단, 텅 빈 거실이 밋밋해 별생각 없이 고무나무와 산세비에리아를 사 왔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식물 애호가들도 받아줄 만큼 별다른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화분을 나는, 얼마 키우지 못하고 땅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 뒤로도 공기정화를 핑계로 몇몇 식물을 들여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집에만 오면 다들 맥을 못쓰고 누렇게 잎이 뜬 채 죽어나갔다. 그 후론 집 안에 초록을 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식물이라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 생명을 단축시킨 다는 게 씁쓸했고, 치열한 육아기에 접어들어 다른 생명을 돌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집 창가엔 생각지 못한 초록이들이 주욱 놓여 있다. 이유인즉슨, 초등학생이 된 네 아이가 학교에서 기르던 반려식물을 모조리 가져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촌 생활을 접고 아파트로 들어간 엄마 집에서 건너온 커다란 화분 두 개(남천나무)까지. 집에 이렇게 많은 식물을 들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눈앞 이 캄캄해졌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강낭콩 와 토마토를 시작으로, 다육이, 테이블야자, 싱고니움, 고무나무, 이름 모를 두 종류의 허브까지 내게 들이밀었다. 솔직한 마음은 학교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엄마를 생각해서 몇 개는 학교에 남겨두고 온 거란다. 그러니 어쩌나. 어떻게든 키워볼 수밖에.      




일단은 거실 창틀에 화분을 주욱 올려두고 며칠은 그냥 지켜보았다. 그런데  가느다란 강낭콩 줄기가 휘어지고, 다육이의 잎이 누렇게 떠버렸다. 이렇게 또 초록이들과 빠른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집 앞 화원에 가서 배양토 한 포대와, 식물에 주는 영양제를 사 왔다. 비어있던 화분에 배양토를 넣어 강낭콩 분갈이를 해주고 쇠 젓가락을 꼽아 지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다육이의 누런 잎은 떼어주는 게 좋다는 꽃 집 사장님 말씀대로 톡톡 떼어냈고, 물을 너무 많이 주었는지 버섯이 자란 화분은 곰팡이 핀 흙을 덜어내고 분갈이를 해주었다. 다행히도 분갈이를 해준 화분에선 작은 꽃이 피었고, 다육이도 더는 시들해지지 않았다.      


나는 요즘, 초록이들을 위해 식물 돌보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기껏 해야 종류에 따라 필요한 빛의 양과 온도, 얼마에 한 번 씩 물을 줘야 하는지 검색해 보는 게  전부지만 작은 화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든다. 습한 날씨 탓에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다육이를 놓아주고, 흙의 마른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화분 안에 손가락을 슬쩍 찔러 넣어 볼 때면,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기 위해 아기를 품에 안고 등을 두드려 줄 때처럼 기분 좋은 만족감이 올라오는 건 왜일까?      


필요한 에너지를 받기 위해 해가 비치는 쪽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토마토는 작지만 강하고, 곰팡이를 털어내고 뽀송한 흙을 입은 후에 꽃을 피어낸 작은 화분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늘진 곳에 놓아두고 기다렸을 뿐인데 반짝이는 연한 연둣빛 이파리를 내보이는 고무나무는 또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마음을 쏟아보니 알겠다. 엄마가 돌보던 수많은 식물들이 엄마가 쏟았던 정성만큼 엄마에게 어떤 위로와 기쁨이 되어 주었는지를.      



이승희 시인의 산문집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실, 돌봐준다는 건 나 역시 돌봄을 받는다는 말에 다르지 않다. 무엇인가에 마음을 준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둘 사이에 시냇물 같은 게 생기는 거니까. 그게 한쪽으로만 흐른다 한들 서로 닿아 있다는 말이이니까. 거기에 발목도 담그고, 얼굴도 비춰보고, 안부도 전하면서. "


꽃에 말을 건네는 엄마의 마음은 짝사랑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넸던 모든 꽃들과 엄마 사이엔 내가 모르는 시냇물이 흘렀다. 엄마는 매일 그곳에 발을 담그고, 얼굴을 비춰보고, 안부를 전하면서 책의 제목처럼 어떤 밤은 식물에 기대어 울었을지 모른다. 엄마의 정원은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한 엄마의 시간이 꽃과 함께 피고 졌던 곳인데...... 엄마를 위한다는 핑계로 나는 어떤 말을 했었나.      


아이들은 말한다. “엄마, 힘들면 초록이들을 보세요. 식물의 초록색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줘서 스트레스를 없애 준데요.”  어쩌다 보니 키우게 된 작은 식물들 덕에 하마터면 몰랐을 엄마의 시간을 그려보고, 초록이들과 함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마음도 본다. 초록이들에게 고맙다. 정말.


조만간 엄마에게 가서 오랜 시간 식물 집사로 살아온 엄마만의 노하우를 배워와야지(물론, 사과도!). 부디 이번에는, 오래오래 초록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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