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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26. 2022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상처받을 준비.

스물일곱에 결혼을 했고 네 아이를 낳았다. 결혼과 출산을 통과하면서 갖게 된 ‘아내와 엄마’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특별할 것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인지 힘들지 않게 육아와 살림을 해냈다.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여자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살아가는 삶이 내겐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집 안에 고인 삶이 가끔은 너무 외롭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우울감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그 또한 ‘여성이자 엄마’인 내가 견뎌야 하는 몫이라 생각했다. 몰랐다. 그러는 사이 매일 조금씩 닳아 없어져 버리고 있던 ‘나’를. 그때 친구 K를 만났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K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함께 읽자고 제안했다. 페미니즘 이라니. 내게 페미니즘이란 가슴을 드러내고 시위를 하던 여성들, 사나운 얼굴로 피켓을 들고 여성의 권리를 외치던 조금은 이상하고 낯선 것이었다. 그러다 나혜석과 전혜린을, 정희진과 권김현영을, 벨 훅스와 록산 게이를 알게 됐다. 그들의 책을 시작으로 페미니즘에 관련한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K와 얼굴을 마주 하고 앉아 ‘여성 혹은 엄마’라고 퉁쳐지는 존재들이 어떻게 삶의 변방으로 밀려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지지하면서 ‘연대’라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됐다.      


윤이형의 소설 <붕대감기> 에는 나이와 직업이 다른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듯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깝지만 먼 사이다. 그들은 서로 연대하고, 실망하고, 손을 뻗다가도 다시 거두고,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솔직히 말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허물어지는 관계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한때는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친밀한 사이라 생각했지만 나이, 직업, 경제적 상황, 결혼의 유무처럼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은 이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도 그랬다.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구들에게 내가 읽은 책을 추전 하기 바빴다.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분노하고, 각성하고, 변화하길 바랐다. 내 마음속에 일었던 작은 불꽃들이 그들의 삶 속에도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길 바랐다. 그들은 나의 친구였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일상을 파고든 촘촘한 가부장의 그늘을 걷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페미니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고, 알지만 삶에 쫓겨 무언가를 변화시킬 에너지가 없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더러는 여성의 도리나 엄마 됨을 내세워 반기를 들고 정색을 표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서운함과 실망감이 쌓여갔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할 땐 고개를 끄덕이던 친구들이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외모 평가를 하고, 여성과 남성의 삶을 구분하고, 모성을 앞세워 기혼여성의 삶을 억압하려 할 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와 다른 목소리,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듣는 것이 괴롭고 불편했다. 결국, 타인을 견뎌낼 힘이 없던 나는 미묘하게 틀어지는 관계 안에서 전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윤이형의 소설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갈등구조 속에서 마음의 부침을 겪어야 했던 예전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더 분명하고 단단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의 유약함, 아이를 키우는 기혼여성으로서 매 순간 똑바로 노려보기엔 삶이 너무 고단하고 퍽퍽해 모른 척 눈 감을 때마다 느껴야 했던 미묘한 죄책감처럼, 페미니즘을 통과하면서 겪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벗어나 타인의 삶을 감각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야기 함으로써, 연대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였다. 서균의 엄마에게 안부를 묻던 진경, 혜미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았던 지현, 진경과 세연의 긴 대화처럼 말이다. 서로를 실망시킬까 봐 마음을 감추거나 덜어내는 대신,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나누었던 그들의 대화는 페미니즘 안에서 길을 잃었던 내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라고 했던 진경의 말을 되뇌어 본다.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은 진실된 말,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기꺼이 손을 잡고 함께 가보고 싶다는 용기 있는 진경의 말은 우리를 ‘연대’할 수 있게 묶어주는 ‘붕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엔 그렇다 할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했던 그들의 노력이 서로를 ‘우리’라는 범주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었을 거라 생각한다. 온전히 같은 하나가 될 수 없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우리’로.     


윤이형의 소설을 읽고 나의 페미니즘을 돌아본다. ‘우리’가 되길 바랐지만 ‘나’만 남아야 했던 시간들. 나의 변화를 지지받고 싶은 마음에 정작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해보지 못했던 내 모습.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말없이 밀어냈던 많은 사람들 까지. 배타적이고 편협했던 나의 페미니즘 때문에 상처받고 상처 주었던 순간들이 아프고 부끄럽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저마다의 결을 가지고 존재하는 각기 다른 세계를 배척하거나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소설 속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그들의 노력처럼, 내가 먼저 밀폐용기처럼 꽉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의 세계를 보고,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믿는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결국엔 나 자신까지도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일이라는 걸. 결국엔 그런 마음이 모아져 나를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 가닿을 수 있다는 걸.  마지막으로 내게 가장 필요했던 말, 위로와 용기가 되어줬던 진경의 말을 옮겨 적어본다. 선을 긋고 싶을때, 마음의 문을 닫고 싶을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을 때 마다 나는 진경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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