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Sep 02. 2022

괜찮아, 조금 돌아가는 것 뿐이야.

남겨진 마음을 따라.

한참 동안 서서 복숭아 포장을 하다 보면 팔토시 위에 노리끼리한 복숭아 털이 소복이 쌓인다. 오른손에 끼워진 장갑 바닥은 손바닥 모양대로 들러붙은 복숭아 털이 도톰한 층을 이뤄 탈탈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장갑을 끼워도 손을 닦지 않고 얼굴을 만지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다. 농사로 인한 시댁과의 갈등이 한창일 땐 복숭아 털 알레르기라도 있길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럼, 누구라도 쉽게 과수원에 나가란 말은 못 할 테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내 피부는 복숭아 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0년 넘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두드러기로 가끔은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와 종종 병원을 다니지만 복숭아 털엔 꼼짝 않는 피부라니. 결국 난 과수원에 나갈 운명이었던 건가?


요즘 어머니는 나에게 매우 친절하다. 잘 웃어주시고, 복숭아도 깎아주고, 아침에 애들 보내고 오려면 정신이 속 빠지겠다고 걱정도 해주신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어서 와라'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도 해주신다. 그게 싫지는 않아도 한 편으론 괜히 섭섭하고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함께 포장을 하다 보면 키가 작은 어머니는 약간의 텀이 생길 때마다 작업대 위에 팔을 올리고 몸을 숙여 기대는 것으로 피로를 덜어낸다. 선별기가 멈추면 다리를 절뚝거리시면서 창고 작업장 한편에 쌓아둔 기스(비품 복숭아)를 정리하고, 남편이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느라 작업이 멈출 때면 아들 주변을 서성이며 무어라도 도울 게 없나 살피신다. 그냥 좀 쉬라는 아들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그런 모습은 억척 스러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짠한 마음이 들게 한다.


작업을 끝내고 복숭아 털을 털어낼 때마다 나는 그동안 남편의 몸을 파고들었을 따가운 털들에 대해 생각한다. 상자를 접고 난자를 정리하는 남편을 뒤덮었을 먼지와, 해거름이 질 무렵 복숭아나무 아래서 남편의 피를 빨아먹은 수 백 마리의 모기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여름이면 매일 빨아 입는 똑같은 색과 모양의 낡은 작업 복, 더는 쿠션감이 없는 크록스 슬리퍼에 대해서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남편의 피로를 매일 지켜보다 보니 삐걱거리던 마음,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 '나도 너만큼 아니 그보다 더 힘들어'라고 관성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말들이 더는 내 안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만 같다. 남편은 생각만큼 고된 하루를 보내고, 생각보다 더 안쓰럽다.




그럼에도 난, 어머니가 내 눈을 보면서 남편에게 좋은 건강보조제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거나,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와중에도 내게 남편의 피로와 힘듦을 호소하면 불쑥 짜증이 나기도 난다.  퇴근 후엔 거실에 누워 폼롤러로 뭉친 근육을 풀다 자는 것이 전부인 남편을 볼 때도 만찬 가지다. 설거지가 쌓여 있어도, 화장실이 더러워도, 집 안이 아무리 장판이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편의 무심함은 고된 그의 하루를 지켜보았다고 해서 너그러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갈등한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삶으로부터 멀어진 나와, 발등에 떨어진 남편과 어머니의 고된 하루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을 들여다본다. 더 내어줄 마음이 내게 있는지,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진실로 그 마음을 꺼내서 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이다. 삶에도 달팽이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몸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달팽이관처럼,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더라도 너무 많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마음을 달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남편의 삶과 나의 삶, 그리고 우리.

어디에 서서 중심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문득 작가와의 만남에서 만났던 '김필영'작가님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기울기이던 상관없이 내가 편하면 그게 평형이라고 했던 말. 어디로 어떻게 기울던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니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검열하지 말 것. 선택과 마음이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 마음을 믿어봐도 될까?


무라세 다케시의 소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의 병을 앓는다는 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설렁설렁 사는 사람은 절대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라고. 지금 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운 건 내 안에 남편에게 내어줄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다. 수백 개의 허들을 넘으며 서로를 향해 쓴 숨을 내뱉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그를 위해 한발 물러설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있기 때문일 거다. 그를 믿고, 그를 믿는 내 마음을 믿기 때문일 거다. 조금은 기울어진 삶이지만 내가 먼저 그의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것이라 생각하자.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자. 지나간 상처에 마음을 두지 말고 남겨진 마음을 믿어보자. 남겨진 마음에 기대 남겨질 말을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 다 지나가는 일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에 기대어 본다. 생각지 못한 길이지만 삶은 언제나 의지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조금 돌아가는 것 일뿐, 온전히 나를 비워내는 것은 아니니까. 아직 난,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내려놓은 것이 아니니까. 돌아가다 보면 나의 세상으로 들어올 그를 맞이하는 날도 있을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요란한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