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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Oct 04. 2022

동그랗게 닳아지는 중.

nothing to lose.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이 추워졌다. 반팔 위에 난방을 입고, 얇은 후드 집업 하나를 더 챙겨 입고 나가도 해가 들지 않는 커다란 창고에 들어서면 한기가 느껴진다. 한두 시간쯤 포장을 하다 보면 작은 창문 새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아직 열흘 정도 복숭아를 더 따야 해서 조금만 천천히 날이 추워지길 바라지만 계절은 언제나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다가오고 멀어진다. 늦은 저녁, 산책을 하러 나가면 제법 발 밑에 낙엽이 치이니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뜨거웠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자꾸만 소매 끝을 당여 손을 밀어 넣는다. 


이제 열흘 정도 뒤면 복숭아 수확을 마친다. 얼결에 복숭아 포장을 하면서 내뱉었던 커다란 한 덩이의 쓴 숨 뒤엔 약간의 성취감과, 피로가 남았다. 브런치에 당선되고 수북하게 쌓였던 글쓰기에 대한 희망은 그새 빛바랜 꿈처럼 흐려져 휘청거리고 있는 꼴이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낸 시간이 있으니 다시 또 나는 무언가를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려 애쓰는 중이다. 


정신없는 일상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종종 우울과 불안의 그림자가 나를 찾아왔지만 매번 빠르게 스쳐갔다. 그것들을 붙들고 있기엔 육체가 너무 피로했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숨어버릴 공간도 숨을 힘도 없었다. 씻을 힘도 없어 그냥 잠들어 버리는 날이 늘었다. 저녁이면 침대에 누워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었고, 마음이 동하는 글을 만날 때마다 조금은 슬펐다. 마음 가득 분주한 침묵이 흘렀다. 


나를 향해 고이지 못하는 시간들을 붙잡고 싶었다. 한 발 다가서면 한 발 멀어지고 만다던 철 지난 사랑노래처럼, 흩어진 시간들을 모으고 모아 어딘가에 꽁꽁 숨겨놓고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들을 다 모으면 나는 내가 바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그럼에도 어쩐지 조금은 동그래진 내가 보인다. 모나고 뾰족했던 마음의 모서리들이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 뭉툭해진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닌 일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로 만들어 버리던 주름지고 삐뚤어진 마음들이 보이지 않는다. 빳빳하게 치켜세우던 목소리들이, 울퉁불퉁했던 말들이, 쉽게 굳어버렸던 얼굴이 한층 누그러든 기분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남편의 삶을 매일 마주하면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땀을 흘리는 동안 우리의 발 밑에 고인 응축된 일상들이 나를 전보다 동그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던 걸까? 


어쩌면 그래서 '시작'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건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귀농을 하고, 나무를 심고, 첫 수확을 하고, 창고를 짓고, 아이들을 키우며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작'들에 대해서. 잃어버리고, 놓치고, 놓아야만 했던 것들 대신 함께여서 가능했던 모든'시작'들. 동그랗게 닳아진 마음이 슬어진 것들을 하나씩 떠오르게 하곤 각성의 시간에 날 데려다 놓았나 보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나는 매일, 조금씩 동그랗게 닳아지는 있는 중이다. 


그래, 계절은 이렇게 또 바뀌었지만 nothing to lose. 

나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시작'을 떠올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내 삶은 희망에 닿아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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