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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Nov 23. 2022

막내는 사랑이지요.

너란 아인 정말. 

생일 한 달 전. 이제야 앞니가 빠진 막내가 훤한 잇몸을 보이며 갖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곧 엄마 생일이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 북클럽 멤버가 들고 왔던 북 케이스가 예뻐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게 생각나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갖고 싶긴 한데 이만 오천 원이나 해서 보류 중이라고. 아이는 '알겠어' 한마디를 하고 돌아 나갔다.


그렇게 한 달. 막내는 매일 저녁 아빠의 등허리 위에 올라갔다. 십 분에 천 원짜리 알바에 뛰어든 거다. 아빠가 이천 원을 준다고 꼬셔도 놀기 바빠 어쩌다 한 번 해주던 밟기였는데. 아이는 한 달을 꼬박 아빠 등을 밟아 이만 오천 원을 모았다. 그리고 생일 일주일 전. 지갑을 털어 책상 위에 돈을 펼치더니 빨리 결제를 하란다. 이만 오천 원을 나에게 주면 자동차가 그려진 손바닥만 한 지갑엔 달랑 이천 원이 남는 상황. 꼬깃한 지폐를 보니 차마 받을 수가 없어 몇 번을 괜찮다 거절했는데도 아이는 덩달아 자기도 괜찮다며 한 번뿐인 생일이라 챙겨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훤한 잇몸을 보여주며 찡긋 웃어주었다. 


휴. 너란 아인 정말. 



셋째를 낳고 알았다. 둘과 셋은 천지 차이라는 걸. 둘째를 낳고도 아기가 너무 예뻐 하나를 더 낳아야지 했다. 그렇게 계획하에 셋째를 낳았다. 그런데 웬걸. 둘과 셋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세상이었다. 8월, 어린이집 방학과 농번기가 겹쳐 출산과 동시에 육아를 해야 했다. 출산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첫째와 둘째를 위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데크 위에 설치한 수영장에 물을 받았다. 물을 채웠다 비웠다, 수영복을 말렸다 입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먹였다. 산후 돌봄 서비스로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셨지만 오시기 전에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새댁이 참 별나다고 했다. (내가 좀 유난스럽긴 하다.)


아이가 예뻐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넷째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는, 더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넷째가 생겼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이  기쁘지 않았다. 당황과 절망 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임테기의 두 줄을 확인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비뇨기과를 다녀왔다. 태교는커녕 세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임신을 한 줄도 모르게 살았다. 발목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지만 힘들다고 내색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게 낳은 넷째가 엄마를 위해 매일 아빠 등허리 위에 올라가는 걸 보니 감개무량하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막내 백일을 넘기고 시작한 자아 찾기 운동으로 넷째는 일찍부터 품 밖에서 자랐다. 형아와 누나 뒤를 쫓으면서 혼자 앉고, 혼자 기고, 혼자 뒤뚱뒤뚱 걸었다. 첫 돌이 되기 전부터 막대 사탕을 입에 물었고, 이유식을 시작할 즈음엔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그래도 아이는 늘 방긋방긋 웃었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보채지 않았다. 다섯 살 무렵엔 혼자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돌았다. 드리프트를 한다고 설치다 무릎을 긁어도 웃으면서 집에 들어왔다. 혼자 가서 떡볶이를 사 먹기도 하고, 주말 아침이면 텀블러를 들고 가 빅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하고 시럽을 두 번 넣은 커피를 사다 주었다. 쿠폰에 도장을 찍는 것도 잊지 않고. 


우리 집 막내는 그런 아이였다. 뭐든 알아서 하는 아이. 알아서 하면서도 징징거리거나 보채지 않는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향해 매일 웃어주는 아이. 매일 밤 수수께끼를 내다 내 옆에서 잠드는 아이.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예쁜 줄 아는 아이. 움푹 파인 쇄골 뼈를 만지작 거리면서 밥 좀 많이 먹으라고 울상을 짓는 아이. 껑충하게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이제 막 앞니가 빠진,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 


아이가 사준 북 커버에 책과 노트 필통을 넣고 들어 보이니 아이가 작은 몸을 베베 꼬며 환한 웃음을 보인다. 아직 생일은 이틀이나 남았는데, 에이포 용지를 자르고 붙여 만든 편지 봉투에 두줄 짜리 편지를 넣어 주면서 아무도 보여주면 안 된 다는 말을 열 번쯤 하고, 꾹 손도장을 찍고야 돌아섰다. 



무지막지하다고 느껴지는 삶도 막내를 앞에 두고 있으면 이렇게 관대할 수가 없다.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게 힘들어 매일 씩씩거리는 엄마를 보면서도 아이는 볼우물이 푹 파이도록 몇 번이고 웃어준다. 어떤 하루를 보내든 잠들기 전엔 있는 힘껏 사랑을 말한다. 콧등 위로 귀여운 주름을 지어 보이면서, 휑덩그렁한 잇몸 사이로 혓바닥을 쏙 내밀면서, 통통한 볼이 씰룩거리게 예쁜 반달눈을 만들면서. 


책상에 앉아 아이가 사준 북커버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본다. 책과 노트 필통을 넣고 끌어안은 채 작은 방을 걸어도 본다. 이번 주에 있을 글쓰기 모임에, 12월 독서모임에 들고 가야지 생각한다.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마음속에 몽글몽글 사랑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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