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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Apr 29. 2019

오답자의 자세

단상 5. 시를 대하는 태도

어릴 적  겉표지가 단단하고 작은 자물쇠가 달린

다이어리에 짝꿍에 대한 시를 쓰곤 했다.

짝꿍의 빨간 볼과 주근깨를 딸기에

빗댄 시도 있었고, 짓궂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 울던 짝꿍에게 바치던

위로의 시도 있었다.


개학 전 날 밀린 일기를 몰아 쓸 때에도

시는 유용했다. 생활 속에 시가 있었다.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보고,

젖은 벽의 달팽이를 보고,

친구 오빠의 다리털을 보고도

시가 술술 나오던 마음이 풍족한 아이였다.

비록 아름다운 시어는 구사할 줄 몰라도

그런대로 단어의 리듬, 날숨의 순간,

사물의 현장감을 살린 시들이 제법 쓰였다.

부담 없이 시를 즐기던 시절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는11살 적 쓴

목련꽃에 대한 시이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목련꽃 잎과

그 외로움을 노래한 시로, 빨간 선의

원고지에 그 시를 적을 때 스스로

시다운 시를 지었노라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개학 후엔 그 시에 감명받은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한 대학교수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주는 글쓰기 특강을

듣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외조모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가서 듣던 수업의

내용은 까마득히 생각이 안 나는데,

대학교 외벽을 가득 채운 아이비 덩굴은

눈에 선하다.  그 아기 손 같은 이파리가

다닥다닥 붙은 담벼락이 유럽의

어느 대학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초로 느낀 선진의 향기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는 점차 어려워졌다.

교과서에 나온 시들에 밑줄을 긋고

선생님이 불러주는 작가의 의도,

시어의 진짜 의미, 시대상황 등을

빨갛고 파란 펜으로 열심히 적다 보면

시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책상 사이를 뚜벅뚜벅 걷던 선생님이

내 앞에 착 멈춰

« 이 시에서 ‘님’은 무엇이지? »

하고 대나무 교편을 탁 치면

« 조국입니다.»

하고 바로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왜 조국인지, 조국은 시인에게

어떤 의미길래 이런 녹진한 시를 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는 점차 멀어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본인이 쓴 시라며 공개를 한다면

친한 사람 한 두이가 분명

‘감성’과 벌레 ‘충蟲’을 이어 붙인 말로

시인을 농락하기도 할 것이다.

나 또한 시를 멀리 했다.

다시 책의 페이지를 부지런히 접고

좋은 문장 몇 구절을 일기장에

옮겨 적을 때에도 시는 읽지 않았다.

시란 어렵고 이해하기 모호한 것이라 느껴졌다.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글을 썼다.

-[…]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학자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다. 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읽을 때는 참고도서를 들춰보지 말자고 당부했다. […]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시를 어렵고 모호하다

느낀 이유는 정답만을 찾아서가 아닐까?

그저 시가 내게 밀려와 닿는 대로

더듬더듬 만져보면 되었던 것을.

내가 시를 읽으며 느끼는 감정이

정답의 범위 안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며

읽었으니 그 시가 온전히 와 닿았을 리 없다.

‘작가가 시를 통해 하려는 말이 이 말일까?’

마치 수수께끼 풀 듯 허겁지겁 달려드는

독자에게 시는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내 삶의 박자에 맞추어 시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이리 읽히면 이런대로,

그리 읽히면 그런대로

시에 다가가기로 했다.

같은 시도 어느 날은 다정하게,

어느 날은 어색하게 느껴지리라.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시를 읽을 용기가 솟기에 읽어보고 싶었던

시집도 언제든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두었다.

계속해서 읽다 보면 감히 쓰는 날도 올까?

하고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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