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비
지독한 변비에 걸린 것처럼 문장이 나오질 않았다.
억지로 쥐어짜 낸 문장들의 조합은 메마르고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되어버린 글들이 서너 개가 저장된 후에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이 쓰고 싶어 잠을 설칠 지경이었는데...
요 몇 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신상을 먼저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며 삶이 윤택해졌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는 건 과영양 현대사회에서 별 거 아닌 세속적인 욕망에 불과하다고 믿었는데,
생선을 먹고 싶을 때 돈걱정 없이 생선을 사고, 버섯이 먹고 싶을 때 갖가지 버섯을 산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별 수 없는 세속적인 인간이 바로 나였다.(내가 사는 곳은 식재료조차 비싸고 귀한 곳이라 버섯은 늘 냉동, 생선이나 새우는 몇 개월에 한 번 꼴로 사 먹는다. 비싼 물가와 가난함의 조합이란 이렇게나 구질구질한 설명을 동반한다.) 언어가 통하니 재치를 맘껏 뽐내며 대화를 주도할 수 있었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주체적으로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재밌고 다정했고, 여행자로서의 삶은 어깨가 제법 가벼운 것이었다.
나의 뇌는 행복에 겨워 매일 둥실거렸다.
삶이 우울하지 않으니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다. 반대로 우울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정말 감정의 배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까. 행복을 향한 갈증과 글 쓰고 싶다는 갈증이 상충하는 한가운데서 길을 조금 잃은 기분이다. 행복으로 한 걸음 가면 글이 멀어지고, 글을 향해 내딛으면 우울해졌다.
그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회전목마처럼 안정적인 일상을 되찾아야 했다. 영어를 가르치고, 번역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한국에서 돌아온 친구를 맞이하는 동안에도 나는 좀처럼 글 쓰는 자의 자세로 돌아오지 못했다. 잠을 너무 잘 자서인가-보통 글의 영감이란 불면의 시간에 찾아오니까- 하는 생각에
늦은 오후 무렵 일부러 진한 커피를 내려마시기도 했다.
아직 여전하다. 메모장에 쓰여진 두 세 문장은 장보기 목록에 밀려 저 아래 내려가 있다. 나는 다른 글쓰기 방식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한 글쓰기’ 같은 것 말이다. (행복해서 글을 못쓰겠다니 웬 배부른 소리.)
이것 또한 성장의 과정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재능에 대해 지나친 의심을 거두기로 한다. 애초에 재능이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행복감의 부피가 조금 더 커진 삶에서 스스로 오롯이 균형을 되찾기를 오늘도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