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한 늪에서 우린 만났다.
이 곳에 온 후 한참을 황망히 지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더듬어 들어가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토끼굴 같은 동네였다. 모든 일이 적당히 알음알음으로 연결되는 곳이라곤 들었지만, 이 정도로 폐쇄적일 줄이야. 이 곳에 오기 전 외할머니가 몇 번이고 ‘저 야물지도 못한 것이 섬사람들하고 어찌 살려고’ 중얼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몇 번의 뜨뜻미지근한 시도와 거절 그리고 긴 우울의 시간을 거쳤다. 괜히 나를 이 곳에 오게 한 님 탓도 해보고, 내 탓은 수도 없이 했다.
새로운 달력이 벽에 걸릴 때 즈음,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프랑스 어학원에 등록했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그 수업에는 이 곳에 산지 20년이 넘도록 불어를 못한다는 나이 든 중국 여자와 금가락지와 번쩍이는 팔찌로 한껏 치장하고 기껏 불어 수업에 나온 태국 여자가 있었다. 며칠을 그들과 섞여 수업을 듣는데 어느 날 그 여자가 왔다. 이 곳에서 한국인을 본 건 처음이었다. 자기는 여행사에서 가이드 일을 하는데 어깨너머로만 배운 불어로도 그럭저럭 살곤 있지만 제대로 배워볼까 해서 왔다고 한다. 수업 등록한지는 꽤 됐지만 일이 바빠서 한동안 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의 뒤엔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일이 바쁘다니. 이 빤한 햇빛만큼이나 그늘이 깊고 음침한 동네에서 기어코 자리를 잡은 한국인을 드디어 만났다. 나는 아기새처럼 그를 바삐 따랐다. 그 여자는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가고, 레스토랑에 가고, 보트를 타고 섬에 가기도 했다. 살인적인 물가에 내가 얻어먹기를 부담스러워하면 자기 여행사에서 할인권이 다 나오니 걱정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와 생각하건대 아무리 할인권 따위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는 나에게 무리해서 돈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금전 가치에 대한 관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이만 먹은 어린애였고 그는 외로웠다.
유희만 즐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 어떤 회사가 사람을 구한다더라, 그 회사는 한국인 직원을 쓴 적도 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귀동냥으로 재빠르게 얻어와 내게 이력서 내보라고 권했다. 쭈뼛거리는 나를 문 안으로 밀어 넣을 적에 그는 나더러 ‘쟤들이 불어 하냐 묻거든, 위 쥬 쁘 빠흘레 꾸하멍 프헝쎄 하고 대답해’라고 속삭였다. 거짓말하는 기분에 귀는 새빨개지고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력서를 내고 나와서 턱을 주억거리며 내가 ‘언니, 나 불어 아직 잘 못한단 말야’하면 그는 삐쭉한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야, 원래 일하면서 야매로 배워야 제일 빨리 배우는 거야. 너 백날 어학원 가봐라. 발음도 억양도 이상한 중국 여자 태국 여자 틈바구니에서 느나.
그에겐 내게 없는 강인함이 있었다. 그 강인함은 다른 말론 야무짐, 또 다른 말론 생활력 정도로 치환될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며 내 삶은 왜 이리 애매하게 평탄해서 나를 유약하게 만들었나 비밀히 다정한 부모 원망도 해보고, 그의 억척스러움을 부러워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타지에서 입맛이 안 맞아 살이 빠진 거냐며 없는 살림에 반찬이며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서 소포로 부치는 모친, 쉬고 싶으면 쉬고 일을 하고 싶으면 하고, 돈이 안 나오는 봉사라도 하고프면 하려무나 하며 늘 지지해주는 가난한 애인, 그리고 힘들 땐 쉬어가라며 어깨를 토닥이는 친구들 때문에 나는 철 모르고 나온 한여름 매화처럼 혼자 고고했다. 모두가 흘리는 땀방울을 보고 주제넘게 동정하며 홀로 표표히 양반의 길을 걸었다. 마음고생은 어떨지 몰라도 , 적어도 몸의 고생은 남의 것이었다.
그의 삶은 내 것과 많이 달랐다. 학대하는 부친, 우울증에 시달리는 모친 아래에서 전쟁 같은 유년시절을 나고서 성인이 되자 넓적 다리에서 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암 수술 후 ‘암보다 더 암 같은’ 가족들을 피해 딴 나라를 떠돌다 이 곳까지 왔다고 한다. 그의 엄마는 가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폭언이 섞인 신세한탄을 했다. 유년시절에 겪은 학대의 생채기는 여간한 것이 아니어서 나는 종종 그에게서 심각한 우울감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와 같이 사는 남자는 다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동거인은 아주 신경질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다투는 날이면 그는 내게 전화를 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소연을 했다. 그는 사회가 말하는 미인상에서 거리가 먼 타입이었고 꾸미는 데에도 재주가 없었다. 가냘픈 어린 꽃떨기 같은 여자들에게는 알아서 척척 떠 안겨지는 사소한 것들도 그는 쟁취해야 했다. 우린 자주 술을 마셨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삶은 유독 그에게 혹독했다. 그 끔찍한 삶의 점액질이 방울방울 모이고 모여 그의 입을 통해 진득한 가래처럼 타악 내뱉어졌다.
-퓨땅 (씨발)
그에겐 부끄러움이라던가, 자괴감 같은 것들이 사치가 된 지 오래라고 했다. 나는 문법이 다 틀린 불어를 뚝딱거리며 밀린 임금을 요구하는 그가, 길 한가운데에서 연기가 펄펄 나는 낡은 차 보닛을 열고 물을 부으며 뒤차들에게 지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그가,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전화로 악을 쓰며 생활비를 받아내는 그가, 전동스쿠터를 타고 가이드 일을 하다 넘어져 손목이 퉁퉁 부은 채 다시 출근하는 그가 부러웠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의 영역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의 나무껍질 같은 강함이 부러웠다. 그가 계속 같은 곳에 상처가 나 도톰해진 흉터라면 나는 이제 막 표피가 벗겨져 화끈거림에 몸부림치는 여린 속살이었다.
그는 이제 이 곳에 없다. 그가 여길 떠날 때 즈음 우린 말다툼을 했고 나는 매몰차게 연락을 끊었다. 그는 떠나보내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 강해지기 위한 필연적인 싸움이었다.
그는 어디서든 살고 있으리라. 잘 살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달력은 여러 번 바뀌었고 나도 더 이상 철없는 매화가 아닌 가늘지만 억센 강아지풀 정도는 되었다. 그의 삶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를 강하게 만들었듯 나의 삶도 이젠 나를 밀어붙인다. 싫어도 부딪혀야 할 일은 해내고, 울더라도 다시 무릎을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가끔 삶이 너무 고된 날, 그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