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달리자

대충대충의 가치

by 순남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간단히 저녁을 먹는다. 조금 쉬다가 아내와 눈빛을 주고받는다.

말이 필요 없다.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한강 변으로 간다. 이미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간단히 스트레칭한다. 팔 한 번 쭉 뻗어주고, 다리 한 번 쓱 돌려준다. 왼 발, 오른발, 헛둘헛둘 달리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는 상관없다. 아내와 나는 우리의 속도로 천천히 달린다. 페이스 8~9분으로 슬로우 러닝한다. 더 빠를 필요 없다. 숨차게 달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대충 달릴 수 있는 속도로 적당한 거리를 달린다. 달리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지면에서 두 발이 떨어지는 것. 날았다, 날고 있다. 달리고 있다. 날아올랐다고, 인간이 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 그 찰나의 순간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일.

Gemini_Generated_Image_6rsf3h6rsf3h6rsf.png 나란히 달리면 기분이가 좋습니다! :)

나이키의 슬로건 Just Do It 이란 말을 좋아한다. 그냥 해봐!

세 단어로 이뤄진 이 슬로건에서 방점을 찍어야 하는 부분은 do보다 just라고 생각한다.

투두리스트가 그렇듯, 해야만 하는 일들(Do)은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반드시 just 가 필요하다.

무겁지 않다. 무섭지 않다. 가볍다. 할 수 있다. 괜찮다. 충분하다. 그러니까, 해도 괜찮다.

Just는 해야 하는 일의 무게를 줄여준다. 중력을 약하게 해 주고, 하늘로 오를 수 있게 해 준다.

to do list가 아니라 , just to do list로!.


여기서 좀 더 나아가 '그냥'보다 대충대충은 어떨까. 대충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통 '대충'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노력 없다, 게으르다, 무책임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충은 꼭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느슨하고, 적당히, 가볍게, 여유롭게 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너무>, <과도하게>, <억지로>, <애쓰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보다 즐거울 수 있다. 그런데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보다도 스스로 무겁게 만든다. 중력 6배, 10배.


3_1.jpg?type=w800 우리는 손이공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찌부러질 듯



그렇게 무거운 중력으로는 달리기는커녕 기어가기도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땅바닥에서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을 가볍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대충대충’


“대충 달리자” 플 풀어서 설명하면,

"과도한 노력으로 스트레스 만들지 말고, 꾸준히 가볍게 본질적인 즐거움을 느끼며 달리자"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손톱이 없어도, 거대한 덩치가 없어도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종특이다.

빠르지는 않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장거리 달리기는 대충대충과도 맞닿아 있다.

100미터 달리기를 인간만큼 잘하는 동물은 많지만, 장거리를 인간만큼 잘하는 동물은 없다. 동물은 그 장거리를 달리는 고통을 견딜 재간이 없다. 왜냐하면 느리게 달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대충 달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계속 달리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하고, 무엇보다 즐거워야 한다.


대충대충의 정신

강하지 않게, 약하게,

조금씩 조금씩,

능숙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자주자주,


어릴 때는 걸음마도 제대로 못할 만큼 미숙하다. 그런데 조금씩 세월이 쌓여, 걷고, 달릴 수 있다.

그러니까 원래 인간은 대충대충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게 어울리는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는 대충대충을 배우기 (아니 다시 떠올리기) 좋은 방법이다.


천천히 달려보자.

처음에는 10초만이라도.

그러다 1분.

그러다 10분.

괜찮다, 오늘은 이만큼만 달려도.

달렸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달린다.

대충대충 달리면서 때로 아내와 시선을 마주친다. 눈빛에 즐거움이 머문다.

대충 달리는 이 삶이 좋다. 대충 살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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