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돈이 웬수지, 네가 무슨 잘못이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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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만 원만
오만 원만 빌려줘
어디에 쓰게?
어디 좀 다녀오게..
넌 또 왜 그러냐. 오만 원도 없어? 그리고 돈 없으면 집에나 있을 것이지. 내가 무슨 자판기냐. 제발 알아서 좀 잘 살자.
동생이 오만 원만 빌려달라고 말했고, 난 짜증으로 답했다.
짜증으로 답하면서도, 카카오뱅크에서 최근 거래 목록에 뜬 동생 이름을 터치한다. 오만 원을 입력하고, 송금하기를 누른다.
그것이 어제 12월 31일의 일이다. 송금하기를 누른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설교를 늘어놓았다. 설교를 늘어놓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동생은 큰 빛을 지고 있다. 거의 오천만 원이 넘는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큰돈을 실물로 본 적이 없다. 예금 통장에 목돈으로 한 번에 그만큼 예치되어 있었던 적도 없다.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감히)
동생도 아마 그 돈,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것이다. 벌지 못할 것이다. 겨우 간호조무사를 하고 있으니까, 월급 이백만 원을 겨우 받고 있으니까. 말이 좋아 병원이지, 4대 보험도 안 되는 3인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대학교를 못 나왔으니까. 뚱뚱하니까. 못 생겼으니까.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잘 속으니까. 쉽게 사람을 믿으니까. 냉정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자기 빚도 아닌데, 남의 빚을 갚으려고 제3금융에서 돈을 빌려서 갚고, 저 스스로도 그 빌린 돈에 질식할 지경으로 살고 있으니까. 그래놓고, 돈 달란 소리도 한 번 못하고, 어쩌다 가끔 생활비가 모자라, 생활비가 모자란 것도 당연하지, 월급이 들어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은행에서 돈을 다 빼 가버리니까, 통장이 텅장이 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오만 원을 빌린다. 동생에겐 더 이상 하소연할 친구도 남아있지 않았고, 내가 아니면, 돈을 빌릴 사사람이 없다. 그래서 오만 원을 빌려준다. 가슴속 꽉꽉 들어찬 짜증을 잔뜩 얹어서.
빌려줬는데, 그런데 오늘, 오만 원을 들고 강원도에 바람 쐬러 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는 그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언제나 그렇듯, 새해 아침엔 어쩐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과 떡국이 한 상 놓이기 마련이다. 식기 전에 떡을 하나 떠서 입에 가져대는데, 삘릴리 경찰서라고 찍힌 전화가 걸려왔다. 낯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 남자는 강원 경찰서 누구라고 말했고, 보이스 피싱인가 싶어서 피식 웃었다. 새해 첫날부터 피싱질이냐고 한껏 욕을 퍼부어주고 끊으려는데, 남자가 동생의 이름을 말한다. 지금 어디 병원이니, 바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보이스피싱이면 돈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강원도 속초 경찰서로 오라면서, 누구누구라고 경찰 명함까지 문자로 보내왔다.
귀찮아 죽겠는데, 이게 뭔 짓이지 싶었지만, 피식 웃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마음속에 가시지 않은 불안. 안개처럼 희뿌옇게 끼어있는 찝찝함,
연거푸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받지 않았고, 그러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욕이라도 해줘야지 싶었다. 이 시국에 집에나 처박혀있지 어딜 갔느냐며, 욕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낯익은 목소리. 아까 통화했던 속초 경찰서 누구누구 경장이라고.
누구누구 경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더니, 호흡이 막히고, 가시지 않은 불안감이 고구마처럼 속에서 얹혔다. 켁켁. 노랗게 뜬 하늘에 노란색 오만 원이 살랑살랑 떠간다, 피식피식 비웃으며.
롱패딩을 대충 걸쳐 입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다. 바로 고속 터미널로 갔다. 버스가 다니는데, 지하철이 다니는데, 평소에는 잘 타지도 않는 택시를 타고 고속터미널로 가서, 가장 빠른 속초행 고속버스표 주세요, 하고 기다린다. 멍 때리다가 시간에 맞춰 좌석에 앉는다. 아예 집에서부터 택시 타고 그대로 속초로 가는 게 나았을까. 아니야, 그랬으면 얼마나 돈이 많이 나왔을 거야. 지금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스스로의 선택과 결과를 저울에 올리고, 잰다. 올릴 때마다 눈금은 다르고,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니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멍한 표정으로 속초행 좌석 버스에 앉아, 덜덜 떨리는 진동을 느끼며(버스 너도 초조하더냐), 엉덩이를 데우는 히터의 기운을 느꼈다.(괜히 열이 나는구나) 버스가 곧 움직였고,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영영 도착하지 않을 것처럼 아무리 창밖을 봐도 서울 또 서울. 서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 같고.(멱살이라도 잡으면서 달리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이 와중에도 잠은 왔고, 깨보니, 속초였다.
아까 통화했던 속초 경찰서에서 누구누구 경장을 만났고, 무슨 무슨 병원으로 갔고, 새해인데, 다들 새해인사도 안 했고, 누구 하나 웃고 있지 않았다. (死者가 앞에 있으니.)
죽은 동생을 보았다.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슬퍼 보이지도 않았고, 억지웃음도 없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안함, 평온함, 심지어 미소.
힐링하고 오라고, 안 갚아도 된다고 용돈이라고 말할 걸, 기죽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한 해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고, 말할걸.
말해도, 이젠, 대답할 수 없다.
해피 뉴이어, 동생의 귓가에 속삭인다. 찬 기운이 입술에 닿는다. 추울까, 동생의 손을 잡는다.
(25년 전 우리가 9살 이후로 한 번도 잡지 않았던 동생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