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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풍 사랑 없는

by 토히


중세의 프랑스에는 영원한 사랑이 있었다. 이름하여 궁정풍 사랑. 기사는 귀부인이나 주군의 부인을 사랑한다. 그리고 접근 불가능함을 은밀히 즐긴다. 그 사랑은 멀리 있어서 아름답고 이루어질 수 없어서 끝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의 다른 말이 ‘있지 않은 모습을 사랑한다’ 와 같다는 걸 알려준 사랑의 실천이었다. 귀부인의 어떤 특징도 기사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선한지 악한지. 우아한지 천박하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기사는 얼굴도 모르는 귀부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한다. 귀부인의 반응이 냉정할수록, 잔인할수록 기사의 사랑은 더 불타오른다. 세속의 욕정과 무관한 사랑 안에서 누구보다 충만함을 느낀다. 궁정풍 사랑에는 이별이 없다. 기사는 잠깐 귀부인을 원망하고 떠나겠다 말해도 이는 기사가 다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한 칭얼거림일 뿐이다. 기사는 사랑을 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것은 상대의 반응 때문에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사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실망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사랑이 식을 리도 없다.

궁정풍 사랑에 대한 흥미로운 강의를 듣는다. 교수님의 열정적인 해설은 계속된다.

“궁정풍 사랑의 본질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다 털어내고 진짜 존재와 존재가 마주 설 수 있는 순간까지 접근하는 것이고, 사랑을 텅 빈 가능성 그 자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성욕의 소비일 뿐이지요. 그 소비가 끝나면 헤어지는 것이고요.”

순간 선생님의 강의가 멈춘 듯 음소거가 되고 하나의 질문에 몰두한다. 나는 사랑을 한 적이 있는가? 몇 달 전쯤, 나는 남편에게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혼을 하자고 말했다. 대충 그러자는 결론이 났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노력은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강의를 듣다 보니 내 이혼 선언은 하나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궁정풍 사랑으로 비춰 보면 헤어짐을 말하는 순간 그 말을 한 사람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과의 사이를 성욕의 소비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소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너는 이만큼 줘야 한다.’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했으니 억울하다.’ 언제나 나만 더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빚쟁이였고 늘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지금까지의 불평불만이 한없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와 남편 각자 자신들의 최고 만족을 위해 최소의 비용을 지불하려는 소비자였을 뿐이었다. 나도 내게 제일 합리적인 선에서 관계를 지속시켜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꼼꼼히 남편의 잘못을 따졌던 것은 그저 내가 희생자라는 생각에 좀 더 선한 사람의 위치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나나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더 많은 만족을 얻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저 준 것만큼 돌려받고 때로는 더 많은 걸 받길 원하는 관계였다. 우리의 관계가 별것도 아니었다는 자각이 남편에 대한 모든 비난을 멈추게 했다. 어느새 이혼을 통해 얻을 것이라 믿었던 기쁨은 모두 사라지고 온통 피곤한 절차들만 남겨졌다. 남편은 열심히 사과 문자와 선물을 보내고, 미래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긴 브리핑을 했다. 우리 사이의 문제가 주고받음의 균형임을 남편이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혼을 은근슬쩍 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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