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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 나의 애장품

by 토히




내 책장 꼭대기에는 거의 4년째 음료수병이 하나 올려져 있다. 병 겉에는 매직으로 “이것을 마시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자도 써 놓았다. 이 음료수로 말할 것 같으면 같이 강의를 듣던 수강생이 쫑파티 때 모두에게 하나씩 돌렸던 선물이다. 나는 그걸 마시지 않고 고이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아이들이 굿즈 모으듯 소중히 모셔 두었다.


음료수의 역사와 같은 4년 전 여름, 아주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다. 광고문구를 대충 봐서 듣게 된 강의였다. 수업마다 글을 써야 하는 강의인 걸 알았다면 절대 듣지 않았을 거다. 강의를 수강 신청한 이유는 여태 접하지 못했던 여성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깊이 있게 읽어 보기 위해서였다. 주마다 한 권씩 책을 읽은 후 감상을 이야기하고, 또 그 책의 주제에 맞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공부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첫날 수업을 들으며 이걸 취소하지 않아도 될지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그날 모인 수강생들의 반짝이는 모습에 매혹되어 나는 조금 용기를 내 봤다.


괴롭게도 가나다순으로 첫 번째인 내가 첫 시간 글을 써서 발표해야 했다. 평생 처음 남 앞에서 내 글을 발표한다는 압박감에 없던 어리광이 튀어나왔다. 여태 글을 써본 적도 없고, 쓴다 해도 발표하기에 부끄러운 글일 거라고 선생님에게 앓는 소리를 했다. 젊은 사람들 틈의 50대 수강생이니 노약자 배려 차원에서 좀 순서를 뒤로하거나 합평에서 빼달라는 요구는 단호히 거절당했다. 가을과 겨울을 거쳐 그 수업을 들으며 꾸역꾸역 글을 써나갔다. 청년들의 솔직한 이야기와 진지한 사유들, 그 속에 있는 것만으로 나까지 젊고 총명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석 달이었다.


그 시절에 나는 음료수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말은 예의 바르고 말투는 고르고 그 이야기들은 너무나 새롭고 깊었다. 이야기할 때면 눈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지,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무엇인지 그를 보며 알게 됐다. 둘째 딸 이름을 거꾸로 한 이름이라 볼 때마다 딸 같기도 하고, 딸이었으면 싶고, 내가 젊었다면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어달라고 쫓아다녔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책맞은 아줌마가 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조용히 숭배했다.


다른 수강생들도 그가 말할 때면 더 집중했고, 선생님도 수업 때마다 그가 어떤 것을 생각했는지 빠지지 않고 물었다. 수강생들이 한마디씩 그 주의 책에 대해 그리고 그 주의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나 역시 그의 순서를 기다렸다. 그의 글이 올라올 날은 또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어떤 반짝이는 말을 할까? 나랑 얼마나 다르게, 깊고 풍부한 생각을 할까? 조곤조곤 내가 모르던 세상을 열어주던 그 말들, 나는 말이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아름다운 말이란 귀를 기울여 듣게 만드는 새로운 말이었다. 없던 걸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허접한 것에 새로운 빛을 주는 말들. 지옥 속에서도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낼 것만 같은 부드러움이 그의 말에 가득했다.


어느날은 가난하고 어리숙한 엄마와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 순간을 그려준다. 어느날은 아빠와의 슬픈 이별도 담담히 들려준다. 자신의 이야기인지 창작인 지 모를 글에서 슬퍼할 만한 일들은 다정한 호흡으로 감싸인다. 그 친구의 글에서는 어떤 사람도 강인하지 않고 사악하지 않다. 연약한 사람들의 조용한 말들과 느릿느릿한 행동들이 따뜻한 빛 속에서 가볍게 떠다닌다.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감상을 전할 때 느껴지는 사려깊음이 자신의 글에도 흐른다.


이제 마실 수도 없는 음료수 얼라이브 오렌지 주스 병이 책장 꼭대기에서 나이를 먹고 있다. 단 하나의 애장품을 통해 세상의 모든 애장품을 이해하게 만든 주스 병이다. 동그란 안경 안의 눈이 동그랬는지 갸름했는지 모르겠을 만큼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흐릿하다. 겨우겨우 내가 다가갈 수 없었던 아름다움 안에 살던 사람이 있었고, 열렬히 우러러보던 마음이 있었음을 알뿐. 하지만 유통기한이 한참 전에 지난 음료수병이 눈에 띄면 늘 기쁨을 느낀다. 이 세상에 진짜 신선이 있었고 내가 영접했음에 대한 기쁨을 매번 다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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