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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24. 2021

행복을 저축하지 않기로 했다

기꺼이, 오늘은 일희 하자



청소를 하다가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를 발견했다.

나는 맛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오래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먹는 습관이 있다. 나와 반대로 맛있는 것부터 먹는 사람들에게 뺏길까 봐 숨긴 곳이 서랍 속이었다. 그렇게 참고 나중에 먹으려고 서랍에 넣어두고서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뒤늦게 먹으려니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아끼다가 똥 된다는 말이 딱이다. 먹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네가 이걸 먹으면서 즐거워할
상상을 하며 줬을 텐데.




굳이 나중을 기약하며 서랍에 넣는 것을 보고 누군가 그랬다. 받자마자 먹으면 더 좋을 텐데 왜 굳이 나중을 기약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때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먹으면 되는데, 무엇이 그리 안타까운지 되물으려다 말았다. 결국 쓰레기통에 처박힌 과자를 보니, 그때 그에게 되묻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이 일을 계기 삼아 서랍 속 물건을 몽땅 드러냈다. 그 과자 이외에도 핫팩, 스케줄러, 사탕 등 시간이 지나서 쓸 수 없거나 먹을 수 없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아껴둔다고 서랍 속에 넣어두고 바로 잊어 방치한 셈이다. 그의 말마따나 내게 저것들을 선물하며 내가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했을 텐데,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과자는 씹고 뜯고 즐거움을 맛볼 기회도 얻기 전에 버려졌다.


청소를 끝내고 앉아 쉬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손이 멈췄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배우 공유가 나와 퀴즈를 풀던 날이 있었는데, 이 날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특집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나 역시 그 방송을 챙겨 봤었는데, 그 방송이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나 보다. 그 후속 방송에서 연출을 맡은 PD에게 최고 시청률을 찍은 소감을 물었는데, 그의 대답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숫자 확인했는데 얼떨떨하다. 재석이 형한테 문자 드렸더니 바로 축하한다고 전화 주셨다. 다음 주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차태현 씨 말처럼 이 직업의 맛은 일희일비니까, 오늘은 '일희'하자고 하셨다"



  사는 내내 나는 '일희일비하지 말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대학시절 나의 멘토도 그랬다. 아무리 큰일도 지나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살아 있으면 또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니 절대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그래서 어떤 감정이든 누르는 것이 습관이었고 슬픔이든 기쁨이든, 나의 감정을 쓰는 일을 경계했다.


그런 나에게 저 말은 지진처럼 마음에 큰 동요가 되었다. 시청률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는 그 날의 주제처럼 나 역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한껏 솟구친 그 감정이 기운을 다하기 전에 쏟아내야 원이 없다. 기쁨, 슬픔, 놀람, 화남 등 희로애락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의 감정은 늘 다리가 고장 난 의자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 산타클로스를 믿을 나이도 지났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것이 터부시 되는 시절도 지났는데, 외로워도 슬퍼도 울면 안 되는 것처럼 눈물을 금기시했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 그대로 맑고 또렷하게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외롭고 슬플 때는 울어야 정상인데, 참고 참고 또 참아가며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을 노력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마음이 하는 일에 인력을 더해 굳이 참는 노력이 필요할까. 울음이든 웃음이든 마음이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추한 것도 아닌데 왜 참고 또 참았을까.


  돌이켜 보니 내게 온 행복을 검열하며 살았다.


과연 이 행복을 누릴 만한지 스스로에게 자격을 물었다. 나의 답은 대부분 '자격미달'이었다. 때문에 내게 온 행복을 온전히 갖지도 내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가까운 곳에 행복을 두고도 내내 가난한 마음으로 살았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오는 '뽑기 같은' 행복도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스스로를 고단하게 했다.


'오늘은 일희 하자'


이 문장에 한동안 시선이 멈췄다. 오늘 행복하다고 해서 그 감정이 내일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마일리지 적립하듯 그저 모아두느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수많은 기쁨의 순간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바로 꺼내 쓰지도 못하고 저축해두는 행복에는 이자가 없다. 쌓아둔 원금만큼 불어나지도 않는다. 정답 없는 일에 일희일비하는 내가 틀린 것처럼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했음을 알았다. 흥청망청 감정 소비해도 고작 하루이니,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인생의 맛 역시 일희일비니까.
기꺼이, 오늘은 일희 하자.






시간에, 녹다

/ 담쟁이캘리




땡그랑 한 푼 두 푼
돼지 저금통 속
동전을 떠올리며


둥글게 둥글게
눈덩이 모아 만든
둥근 눈사람


눈코입 붙여두고
꽁꽁 언 손 호호 불며
밤새 두고 보던 눈사람



땡그란 정오의 햇살에
슬금슬금 녹아 간 데 없이
머문 자리 물만 흥건하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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