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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살고 싶었다

가끔은, 걔처럼 살고 싶기도 하고.

by 담쟁이캘리


개처럼 살고 싶었다.



본능에 충실하며 기분에 따라 꼬리를 흔들고 내리는 개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울고 웃는 일에 눈치 볼 필요 없는 개가 되어 속 시원히 울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온전히 솔직할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울면 날 때부터 절름발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나의 삶이 더 깊은 불행으로 기울까 두려웠다. 그래서 애써 웃으면 개중에는 ‘그 꼴을 하고도 웃을 수 있다니 너도 참 독하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이들도 있었다. 되지도 않는 말들은 듣자마자 후딱 까먹고 쓰레기통에 처박았어야 했는데, 영양가도 없는 걔들 말에 마음만 멍들었다. 그때는 어려서 쓸데없는 말들을 쳐내는 법을 몰랐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뱉기 바쁜 사람들을 향해 개처럼 짖어대고 싶었다. 뚫린 입이라고 다 말인 줄 아느냐고, 네가 뭔데 내 인생을 후려치느냐고 으르렁대고 싶었다. 아, 그렇다고 개처럼 살게 해 달라고 빈 적은 없었다. 가끔은 인생을 견생(犬生)과 맞바꾸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안 해도 되는 어떤 애를 보고 걔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오락가락했으니까.



개든, 걔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랴. 온전한 나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치던 때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 도망에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라는데 태생이 달릴 수도 없는 삶이었다. 때문에 몸 대신 마음이 습관처럼 도망쳤다. 제 자리에 버티고 있어야 할 마음이 도망자 신세였으니 거울 속의 내가 자랑스러울 리 없었다.






나를 놀리는 아이들 말을 귓등으로 흘리던 시절도 있었다.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여섯 살 때까지 휠체어 없이는 걷지도 못하던 신세였다가, 뒤늦게 걷기 시작했을 때 딱 하룻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비수처럼 내리 꽂히는 말들도 무섭지 않았다. 걔들이 뭐라고 하든, 걷지 못할 거라던 의사의 진단을 뒤엎고 일궈낸 걸음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걸음마를 뗐으니 어색한 것은 당연하다 받아들였고 모두가 처음 걸을 때는 다리를 저는 줄 알았다. 설사 놀림거리가 된다고 해도 아주 잠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흐르는 중인지 몰라서, 내가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해서 용감했다. 매일 놀림거리가 되어도 견딜만했다. 걸리는 것은 딱 하나. 양쪽 발 뒤꿈치부터 종아리까지 지네처럼 생긴 수술 자국뿐이었다. 지네같이 생긴 수술 자국이 끔찍하게 느껴져서이기도 했지만, 또래 아이들 모두 매끈한 종아리를 가지고 있어서 더 그랬다. '다르다'는 말로 기어코 선을 긋는 게 이것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 이유로 한 여름에도 긴 바지를 고수했고 스포츠 양말만 신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감췄으니 어색한 걸음만 잘 걷게 되면 금세 놀림감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열두 살 무렵, 아빠가 찍어준 홈 비디오 속 내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이 모든 생각은 바보 같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 나 왜 저래? 나 저렇게 걸어?”



우습게도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으면서도 그제야 나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아킬레스건을 긴 바지와 스포츠 양말로 가리면 '아무도 모르는 흉터'정도로 이해했다. 미련하기 그지없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진짜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고 있는 영상 속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내가 갓난아이 때부터 온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집에서 밥 먹는 것부터 여행을 떠나는 것까지 수많은 일상을 담았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걷고 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빠의 홈비디오가 일순간 가장 잔인한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무턱대고 용감했던 하룻강아지 같던 마음은 죽었다.



“아빠 이제 비디오 찍지 마. 갖다 버려.”



그렇게 말하고 정작 비디오테이프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건 나였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도 영상 속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때부터 귓등으로 흘리던 아이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리병신…. 아닌 줄 알았던 그 말이 다 맞았다. 나는 머리만 감추면 아무에게도 안 보이는 줄 아는 오리랑 다를 게 없는 진짜 미운 오리 새끼였다.






사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 거울 속의 나를 봤다는 것. 그것 말고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였다. 그런데 나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무섭지 않던 아이들의 말들이 두려워졌고, 신경 쓰지 않던 시선들이 모두 내게 꽂혔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에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었다. 다른 게 맞아서, 걔들과 같다고 할 수 없어서 무리를 겉돌았다.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나'를 꼴 보기 싫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하는 삶인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가면 몸이 자라는 일처럼 걸음도 알아서 잘하게 되는 줄만 아는 멍청한 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그 후로 줄곧 개든, 걔든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졌다. 그 마음이 짙어질수록 나는 지독히도 외로웠다.



개처럼 살고 싶어도 진짜 개가 되지 못해서 그 대신 강아지를 키웠다. 여전히 나와 다르게 본능에 충실하며 기분에 따라 꼬리를 흔드는 개가 부러웠고, 닮고 싶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자연스레 개처럼 살고 싶었던 그때를 회상했다. 어떻게 해도 남들과 같아질 수 없어서 늘 혼자였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이 녀석의 모습에 예기치 않게 위로받았다. 나의 생김새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안아달라고 애교를 피우는 녀석이 고마웠다.





가만히 앉아 녀석을 쓰다듬다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눈'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아빠의 홈 비디오와 '나 자신'을 떠올렸다. 되돌아보니 나를 부끄러워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뒤뚱거리는 모습이라도 기록하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그저 나를 비추는 잔인한 거울이라고만 생각했다. 정말 내가 부끄러웠다면 홈 비디오로 기록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아빠는 나조차도 부끄러워한 나를 감춘 적 없었다. 나 스스로를 증오할 정도로 부끄러워해 봐서, 그 마음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금세 이해했다. 어린 시절 잘못 버린 시간들을 헤아리다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르다'는 말로 수십수백 번씩 선을 긋는 사람들이 야속하다면서 정작 나를 안아주지 않고 너무 쉽게 버렸다. 당시 가장 상처 받았을 것은 내 마음이건만, 그것을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모르고 서툴러서 평생 마음을 외롭게 다. 홈 비디오테이프와 나를 버릴 것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인생을 함부로 말하던 걔들 말들부터 버렸어야 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섣불리 버리는 바람에, 꽤 오래 마음이 지옥을 살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을 깨닫고 나니 이제 정말로 개처럼 살고 싶다. 내 인생을 걔들과 맞바꿀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내 마음을 갉아먹는 허튼소리를 들으면 왕왕 짖을 수 있는 개처럼. 거울에 비친 나의 생김새가 어떠하든,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든 간에 그저 '나'라는 이유만으로 세차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살고 싶다.








낙화

/ 담쟁이캘리




버려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버리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강단 있는가



그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과거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고통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버려야 할 때



무성한 복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내일을 향하여
나의 과거는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어제가 지던 어느 날


나의 아픔, 나의 고통
옛터를 텅 비운 듯 고요해진
내 영혼의 짙은 눈




원시: 이형기 시인의 <낙화> 패러디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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