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Mar 15. 2021

여우비

말 줄여버린 마음: 빈 말의 의미



여우비

/ 담쟁이캘리



어느 날, 머릿속으로 당신이 내렸다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첫눈에, 일상의 고요를 깨고
머릿속으로 당신이 주륵주륵 내렸다


맑은 어떤 날
비로 젖어든 당신은
온종일 빈틈없이 머릿속을 걸어 다녀
마음을 적셨고 흠뻑 젖은 내가
똑똑, 당신에게 흘렀다


천둥 번개처럼 밤낮없이
번쩍 하고 머릿속으로 튀어 오른 당신은
긴 긴 우기(雨期)가 되어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깊은 밤 당신을 그리는 머릿속으로
마음을 간질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하루가 다르게 샘솟는 마음이 흘러
당신이 머문 자리에 꽃이 피었다


밤이슬 맞은 꽃잎에서 퍼지는
여전한 향기가 당신을 향해
올곧게, 진동했다


몇 날 며칠 당신을 품어
오롯이 피어낸 꽃 한 송이 꺾어 들고
비 개인 어떤 날, 당신 앞에 섰다


오랜 장마 끝에 마주한
황홀한 무지개다리를 걷고 걸어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다



* 진동하다: 흔들려 움직이다




사람이 하루의 날씨를 결정할 때가 있다. 그 사람으로 그늘진 마음에 볕이 들고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릴 때가 있다. 분명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날인데, 가랑비 젖듯 속절없이 마음이 젖고 마는 날이 있다. 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아도 마른땅처럼 딱딱하던 마음이 첫눈에 촉촉이 젖어, 그칠 줄 모르는 비가 되어 머릿속을 거닐 때가 있다. 맑은 날 별안간 쏟아지는 여우비처럼 찾아와 기나긴 우기가 되어 머릿속으로 주륵주륵 내릴 때가 있다. 사랑을 열병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예고 없이 내린 비에 홀딱 젖고만 몸에 드는 감기와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애끓는 마음이, 그리움으로 열병을 앓는 모습이 불쑥 찾아든 환절기 감기와 꼭 닮은 모양을 하고 있으니.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면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