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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ul 04. 2022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갗을 스치기 무섭게 비가 내렸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금세 굵어져 마른땅 위를 세차게 두드렸다. 똑똑, 서둘러 펼친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꼭 노크하는 듯해 한참을 빗소리에 귀 기울였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던 아스팔트 위가 순식간에 물로 흥건해진 광경을 보며 메마른 무언가를 적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크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환하는 계절 중 여름의 차례가 왔고 장마의 시작과 함께 우기에 들었다. 비 내리는 풍경이야 사는 동안 수십수백 번은 넘도록  본 아주 익숙한 장면이거늘. 불현듯 빗소리가 똑똑, 땅을 노크하는 듯한 무언의 언어로 느껴지는 생경함에 취해 빗소리를 배경 삼아 긴 생각에 잠겼다.

                                                                                                          


이내 노크하듯 내리는 빗물을 반기며 쭉쭉 빨아들이는 밭과 쏟아지는 빗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류하듯 넘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동시에 떠올랐다. 가뭄 든 땅을 적시던 단비가 한순간에 몸집을 불려 홍수가 되듯이, 온전히 받아 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넘치게 주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무언가 넘치게 받는다는 것은 모두 풍족하고 좋은 것이라 여겼다. 쏟아지는 것들의 양에 집중했지, 쏟아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적 없었다. 익숙한 빗소리가 노크하는 소리로 들린 것은 어쩌면 내 마음을 향한 두드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랜 묵상에 잠겼다.





  무언가 노크해  때 문을 활짝 열어젖히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으로 들일 수 없다.    



  내게는 글에 대한 영감도 여름날 장마처럼 예기치 않게 온다. 여러 날 동안 쌓인 단어와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비구름처럼 등치를 키우다 별안간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때 쏟아지는 것들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글쓰기의 기후가 달라진다.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날은 맑음. 문장도 제대로 앉히기 어려울 만큼 이리저리  마음이 나부끼는 날은 흐림….



마음의 기후가 좋지 않을 때는 장마가 든 여름을 대하듯 날이 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우기가 지나길 잠자코 기다리며 훗날 더 단단해질 것들에 대하여 기대한다. 홍수가 지나 자리에 무너진 둑을 세우고 땅을 고르는 일처럼 언젠가 예기치 않게 쏟아질 것들을  받아낼 수 기를 기도하며 제들끼리 엉기는 생각들을 솎아낸다.



  감정이나 생각도 틈이 있어야 우회가 가능하다. 적당히 성기게 두어야 불현듯 떠오른 영감도 자유자재로 몸집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 나 역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리라 다짐하며 자리에 앉았다가도 머릿속이 빈틈없이 꽉 찼을 때는 모든 것을 멈추고 생각을 환기시키는 일에 집중한다. 제 아무리 글쓰기를 사랑한다고 해도 열기에 녹초가 되지 않으려면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길을 내어야 한다.



대부분의 글들은 앉은자리에서 뚝딱, 도깨비방망이처럼 나오는 일이 드물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 속에서 불쑥 떠오르는 문장들을 메모장에 옮겨두기를 반복하다, 그 안 응축된 생각이 언어로 부드럽게 체화될 때에야 온전한 한 편의 글을 이룬다. 이때 엉긴 생각들이 부드럽게 흐를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일도 마음의 문을 여는 작업의 일환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지러이 나부끼는 생각문장이라는 틀에 담아 정돈해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자기 마음을 가꾸는 일과 맞닿아 있다. 영감은 한여름 소낙비처럼 예기치 않게 오지만 그 무엇이 노크해 올 때 문을 얼마큼 열어 두었는지, 쏟아지는 것들을 얼마나 잘 흡수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어떤 글들은 엉덩이로 버틴 시간과 비례해 완성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내지 않고 오로지 쓰기 위해 쓴 글은 문장들끼리도 호응하지 않아 결국 쓰기 자체를 포기해야 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을 는 이유는 꾸준한 기록이 가진 힘을 믿기 때문이다. 메모장에서 넣어두고 묵힌 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술술 써지는 마법을 부릴 때가 있다. 마치 설익어서 꼭꼭 씹을 수 없던 밥이 적절히 뜸이 들어 먹음직스러워졌을 때와 비슷하다. 그 글을 읽은 누군가는 어쩜 이렇게 맛난 글을 지을 수 있나 싶겠지만 내게는 '갑자기' 지은 글이 아닌 '드디어' 완성해 낸 오래 고대해 온 순간이다.



  영감을 얻고도 한 편의 글을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면서 미완이던 것들을 완성하고 온전한 글을 이뤘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랴. 노크하듯 찾아온 영감을 바로 흡수하지는 못해 시간은 들었어도 흘려보내지 않고 스스로 소화해낼 때까지 기다리며 묵혀둔 덕분에 무르익은 열매를 얻었으니. 노크하듯 쏟아지는 것들을 받아내는 자세를 점검하는 일은 꽤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글을 이루지 못한 짤막한 문장들을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리고 또 오늘, 메모장에 묵혀둔 문장 속에 응축된 마음을 차근하게 풀어낸 지금  드디어 한 편의 글을 지어 완결의 마침표를 찍는다.






  한여름 소낙비처럼 예기치 않게 오는 것이 영감이랴. 세상 일도 모두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길을 글쓰기에 비할 수야 있겠냐마는, 메모장 속에 묵혀두었던 글이 불현듯 빛을 보는 데에는 마음가짐이 주효한 역할을 다는 점에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깨쳤다. 크든지 작든지 꾸준히 기록하며 쌓아둔 것들이 예기치 못한 글로 새로 태어났듯이. 자잘하고 보잘것없어 보이 뻔한 일상도 언젠가 태산으로 불어 멋들어진 경치를 이룰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인생이라는 것이 어느 날은 꽉 막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빈 문서 같고 겨우살이 하듯 써내려 간 삶의 문장들은 졸필 같을지라도. 노크하듯 내리던 빗줄기가 금세 마른땅을 적셨듯이. 예기치 않게 오는 영감을 받아들일 때와 같이 마음가짐을 새로 한다면 저마다 멋진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내일도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전혀 알 수 없으므로 더 기대할 수 있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언제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없는 인생은 유달리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크하듯 쏟아지는 영감 같은 하루를
글 짓는 마음으로 살아낸다



당장은 온전히 소화해내기 어려운 일들도 글 쓰는 것처럼 하루씩 잘 살아내보면 차곡차곡 자기만의 이야기가 쌓여 한 편의 작품이 되는 어느 멋진 날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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