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회사를 밥먹듯이 옮겼다. 그 누구와 상의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그만두는 회사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나름의 이유'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세상 그 어떤 일에도 정답은 없고 결국 그 답은 본인 스스로 찾아가거나 만들어가는 거라는 생각에서다.
어느 곳이든 '이직처'를 구하고 나오는 나와 달리, 오빠는 아니다 싶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물론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더 나은 경력계발을 위한 선택이었다. 내 입장에서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뭐든 알아서 잘 해내는' 성격 탓에 그냥 믿고 응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빠는 그만두고 나면 백수가 체질인 사람처럼 걱정 없이 놀았다. 빈 말이 아니고 진짜 빈틈없이 잘 놀았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나 하나 받아줄 곳이 없겠냐.'며 늘 자신이 넘쳤다. 오빠가 몸 담은 업계는 대체로 나이대가 높은 편이라, 나이 어린 경력자에게는 확실히 블루오션이었다.
오빠는사회생활을 일찍시작해 철드는 것도 빨랐고 세상 이치에 밝았다. 하나를 깨치면 두세 가지는 척척 응용할 줄 알았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데다, 모르는 게 있으면 끝까지 파고들어 기어이 정복하고야 마는 학구열도 있었으니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는 처음부터 회사생활을 잘하는 '회사가 체질'인 사람은 아니었다. 꽤 오래도록 '화이트칼라'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는데,현장실무자의 고충을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무조건 오더만 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한 번이라도 가 봤냐?
몇 해 전 방영된 드라마 <미생>에 등장하는 한석율이라는 '현장 우월주의자' 캐릭터와 똑 닮아 있었다. 오빠는 현장의 긴박함과 생생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일이 사무직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회사에서 취직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사무보다 실무가 더 어렵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름의 신념이었다.
각자가 하는 생각에 맞고 틀린 정답은 없으므로 오빠의 생각을 존중했다. 다만, '그러므로 회사에 취직하는 일은 없을 거다'라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내 입장에서 그것은 비약이었다. 오빠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경험해 보지 않고 부정하는 것은 비난에 불과하다'라고 여겼다.
나는 가족이기 때문에덮어두고 이해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 한 번이라도 직장생활을 해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단칼에 거절당했지만설득은 계속되었다.
나중에 아들이 가정환경 조사지에 오빠 직업을 현장직이라 쓰면 좋겠어, 회사원이라 쓰면 좋겠어?
여기서 확실히 해 둘 것은 '현장직'을 비하할 의도는 단연코 없었다. 다만, 경험해 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오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내 나름의 초강수였다.
어릴 때부터 오빠는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했고 하루빨리 기반을 잡아 가정을 꾸리는 일을 꿈꿨기에,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 것같았다.내 생각대로 오빠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성공했고 회사에 취직했다.안타깝게도 오빠의 결혼은 아직까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지만.
내 눈에 오빠는이 세상 그 누구보다 멋지고 든든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지만,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명함'이 중요했다. 아무리 사회가 변하고 다양한 인재상을 원한다고 해도, 모든 채용시험의 1차 전형이 서류심사인 이상, 서류에 적지 않은 지난 삶들에대해 먼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자격증, 어학점수, 공모전 입상 경력 등 '삐까뻔쩍한 이력'으로 당락이 나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선천적인 핸디캡 때문에 처음 구직활동을 할 때, 서류 전형은 무조건 탈락이었다. 지금이야 이력서 양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만 해도 장애 여부를 필수로 적어야 했는데 그때는 정말 수도 없이 떨어졌다.
나중에는 이력서에 '장애 여부'를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를 골라 지원하기도 했다. 경력이 없는 신입이었으니 이전에 지원한 이력서와 똑같은 내용이었는데, 그 체크 항목 하나 뺐다고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이쯤 되자, 이전 이력서 양식은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을 뽑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거르기 위한 장치' 같이 느껴질때도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 불편할 뿐 걷고, 뛰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업무를 보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서류전형의 문턱을 넘기가 어려웠다.개중에는 '당신이 우리 회사 인재상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지만, 장애인은 채용하기가 어렵다'라는 답변을 준 곳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회사에서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며 면접제의를해왔다.
고대하던 면접의 기회가 생겼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면접 전짤막하게 사전 전화 인터뷰를 먼저 진행했는데, 자기소개서와 증명사진 속 밝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며최종 면접까지 무사통과해서 꼭 보자면서 면접 일정을 잡았다.
미리 면접장으로 가 준비해 온 말들을 속으로 복기했다. 오랜 준비 탓에 떨지 않고 나의 장점들을 어필했다.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면접장을 채울 만큼 분위기도 좋았다. 말미에 '그럼 또 봅시다'라는말로 당연히 합격을 점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면접장을 나섰다.그 순간, 면접관은 내 걸음걸이를 보고는 핸디캡의 여부를 모르고 한 결정이었다며 합격을 번복하기도 했다.
하여간 내가 오빠가 '현장직'이라는 말로 누군가에게 덮어놓고 얕보이지는 않을까염려스러웠다. 혹여나처럼 단어 하나로 한계를 미리 정할까 봐. 오빠는 그런 불이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사무 경험까지 있으면 현장과 사무를 두루 섭렵하게 되는 것이므로, 오빠의 나이가 어리더라도 경력이 출중해 더 좋아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못 해 먹겠어, 때려치울래.
회사원이 된 오빠는 6개월 만에 고비를 맞았다. 그런 말이 있다. 회사생활은 3, 6, 9가 고비라고. 내게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오빠의 퇴사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