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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29. 2020

부디, 무사히 그리고 안녕히…

세상 일은 늘 마무리가 어려웠다




이번 상반기만 잘 마무리하면
회사 상장하는 건 시간문제 아니야?



뒤돌아 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에서 웃는 얼굴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하나님 믿으면 기도빨 좋을 테니 술술 풀리게 기도 좀 해보라는 말을 덧붙인 그는 내가 다니는 회사 대표였다. 스물여덟, 명석한 두뇌를 그대로 썩힐 수 없다며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오피스텔에서 간이 사업을 차린 지 어언 십 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터를 잡고 홈쇼핑에 건강기능식품을 유통하는 회사 중에서도 ‘이름 난’ 그는 소위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본인 피셜에 따르면 그 흔한 학원 하나 다닌 적 없는데도 교과서만으로 모든 과목을 마스터하고 S대에 합격해, 박사학위 과정까지 밟느라 군대도 방위로 빠졌다고 했다.



송승헌과 똑 닮은 외모 탓에 잠시 연예인의 꿈도 꿨으나, 성장호르몬이 분비되는 청소년기에 잠을 포기하고 공부를 즐기는 바람에 키를 못 키웠단다. 때문에 키는 170cm 간신히 되지만, 마음은 크고 높아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야겠다는 일념 하에 사업을 시작했다는 나름 ‘홍익인간’적인 경영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문제는 오로지 자기 기준에서 해당되는 사실이라는 데 있었지만.




대리님 보고 해 드리는 거예요,
대표님은 진짜 양아치 같아요.



홈쇼핑 업계 내에서도 ‘이름 난’ 기업이 된 이유는 파워가 아니라 ‘대표의 악명’ 때문이었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통에, 그간 유지해 온 거래처들의 반응도 모 아니면 도였다. 추진력 덕분에 같이 상생했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밀어붙이는 통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거나. 얼마 전에도 홈쇼핑 편성과 함께 물려 방송하는 ‘잽핑’타임에 들어갈 PPL을 헐값으로 후려쳐 계약하자고 우기는 바람에 애꿎은 A채널 방송국 차장만 볼 멘 소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방송 프로그램 협찬 광고주이자, 중소기업 중에서도 유독 PPL 제작 및 협찬에 거금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서였다. 사전에 3-4회 차 이상의 협찬 광고주를 끼고 진행하는 방송 특성상 그를 잘 구슬리기만 하면 분기별, 연간 계약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다들 발톱을 감추고 웃는 낯으로 그 앞에 설 뿐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에도 자기가 욱여넣은 계약이 성사되자 입이 귀에 걸려서 회사 상장의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말했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정주영 회장이라고. 될 때까지 하니까 되잖아.



사회 초년생일 때만 해도 표정관리가 어려워 여러 번 애먹은 적 있었다. 적당히 맞장구도 치고 딸랑거리는 맛도 있어야 상사의 예쁨을 받기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지켜온 고집이나 신념을 꺾는 일이 참 어려웠다. 동료가 죽는소리를 하면 거침없이 총대를 멨고, ‘걸 크러쉬’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사이다 발언을 일삼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대표가 좋아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전화해서 으름장 좀 놔’라고 하면 영문도 모르면서 화를 내고, ‘미안하다고 하고 방송 좀 따 봐’라고 하면 또 을의 비애를 읊으며 대표가 원하는 답을 손에 쥐는 법도 제법 익혔다. 그가 말하던 것처럼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고, 흐름이 좋은 걸로 봐서는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돌이켜 보면 세상 일은 늘 마무리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뜻하는 대로 술술 풀리던 그 날 오후, 나는 예고도 없이 외할머니의 부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정신으로 통화를 했고 어떻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워낙 고령인 탓에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녀의 부재를 연습했지만, 실전은 늘 연습보다 가혹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부리나케 회사를 나서던 나에게 정말 혼자 갈 수 있겠느냐며 손에 택시비를 쥐어준 걸 보면 남들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이후, 스스로 기억하는 최초의 죽음이었다. 여든아홉. 고작 스물 하고도 여덟 해 갓 넘긴 내게는 도저히 감도 안 오는 먼 나이. 그 길고도 험했던 그녀의 생이 작디작은 영정사진 속에 담겨 환히 웃고 있었다.




 아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예쁜 손녀 왔네.



마땅히 들려야 할 그녀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장례지도사가 고인에게 제를 올리는 법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모든 말들이 귓등만 때리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저 얼른 그 말이 끝나고 인사할 시간만 기다렸다. 나는 각자의 종교에 따라 묵념을 하셔도 되고 절을 하셔도 된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절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엎드린 채로 있었다. 스무 해 가까이 지켜온 종교에 대한 신념도 그녀 앞에서는 백지가 되었다. 마지막 가는 길 온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禮)였고, 영(英)이 되어 행여 이승의 말을 듣지 못할까 봐 온 몸으로 전하는 인사말이었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조문객을 맞느라 애도할 여유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빈소에 놓인 방석을 베개 삼고 이불 삼아 쪽잠을 잤고, 가족들 입회 하에 고인을 염하는 자리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평생 ‘아프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뱉어본 적 없는 그녀는 관에 들어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왼쪽 무릎이 굽은 채였다. 너무 오래 굽어 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는 장의사의 말이 비수가 되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가슴을 내리치며 곡을 했다. 고인(古人)이 된 그녀와 작별 인사의 시간을 주었고, 어머니가 들어가 그녀가 입은 수의를 만지작거리며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았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눈에 담았다.




경로당 최 씨 할머니가 수의 맞출 돈이 없대.
나는 또 맞추면 되니까 내 거 줘.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외할머니는 경로당에 형편이 어려운 최 씨 할머니의 사정을 듣고는 자신의 수의를 주자고 권유했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수명이 짧아서 장수해도 예순아홉 혹은 일흔이라, 경로당에서 노인들에게 영정사진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외삼촌과 큰 맘먹고 장만한 고급수의였다. 한데, 그녀는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생인데 그리 비싼 것이 무엇이 필요하냐면서 자신의 수의를 양보했다. 본인은 B상조 보험에서 패키지로 제공하는 수의를 입고 장지로 향했다. 



집안 식구들 중에 가장 장수했다며 이 정도면 호상(好喪)이라며 남겨진 자들을 위로했지만 기나긴 생, 한 줌의 재로 저물어버린 그녀를 본 가족들 앞에 '좋은 죽음'이란 없었다. 수목장을 치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외할머니의 부재를 실감했고, 온몸을 휘감는 허함에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돌이켜 보면 세상 일은 늘 마무리가 어려웠다. 예고 없이 맞이한 끝은 더욱 그랬다. 얄궂게도 그녀가 없어도 시간은 흘렀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는 일상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됐다. 그녀의 부재를 머리로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요양원에서 외할머니의 짐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박정숙 할머니 손녀 되시죠?
할머니가 참 좋으신 분이셨어요.



요양사는 장례를 치르느라 정신없을 것 같아 이제야 연락한다며 조심스레 그녀의 마지막 안부를 물었다. 잘 떠나보냈다는 으레 하는 대답을 뒤로, 생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든아홉. 길고 긴 생을 살면서도 정신 한 번 놓은 적 없이 총명하던 그녀가 마지막 순간을 앞둔 한 달간 오락가락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저도 그녀는 꼿꼿하고도 멋진 어른이었노라고 전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욕창이 생길까 보살피는 동안에도, 다른 할머니들은 정신이 없으니 욕도 서슴없이 하는데 그녀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노라고. 딱 한 번 표현을 하신 적 있었는데 그마저도 ‘아프다, 쫌!’이라는 표현이 전부였고, 요양사가 그녀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할머니 옷이 참 예쁘다 했더니 ‘그래? 그럼 이 옷 너 줄까?’ 하고 환하게 웃더라고 했다.



무엇을 하든지 말 끝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달고 지냈다는 그녀는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참 ‘정숙’한 여인이었다. 요양사에게 짐을 받아 들고 나서며, 그녀가 마지막까지 머물던 침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살아생전 요양원에서 본 그 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되감아졌다.




하루가 걸려도 좋고,
이틀이 걸려도 좋으니까 우리 집에 가자.



외할머니가 세상과 작별하기 일주일 전, 처음으로 집에 가자며 떼를 쓰던 날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얼른 가서 일해야지, 출근해야지’라고 말하며 배웅하던 그녀가 이틀이 걸려도 좋으니 우리 집에 가자고 하던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을 울렸다. 머리로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그녀의 부재가, 다시 낯설게 다가와 마음으로 그녀를 떠나보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들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죽었던 번호가 새로운 친구로 떴다. 'NO JAPAN'을 프사로.



어느덧 4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도 내 핸드폰에는 ‘외할머니’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핸드폰도 잘 쓸 줄 모르던 그녀의 번호가 카톡에 새로운 친구로 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는 내 꿈속에서 자주 세상을 떠났다. 열 번은 넘게 장례를 치르는 꿈을 꿔 울면서 깰 때마다 '꿈은 반대라며 손녀 덕에 오래 살겠다'던 그녀는 돌아가신 뒤로 내 꿈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세상 일은, 늘 마무리가 어려웠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디 무사히, 그리고 안녕히 보내는 일밖에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외할머니와 나는 음력 생일이 하루 차이였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외할머니 생신 날 양수가 터져 내 음력 생일은 '외할머니 생신 다음 날'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2016년 6월, 본인의 음력 생일이자 나의 양력 생일 바로 다음 날 돌아가셨다. 최초로 엄마가 부고 소식을 듣고 요양원에 갔을 때, 외할머니는 그 전날 밤 엄마가 생일선물로 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난 뒤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우리 손녀 생일이니 축하 듬뿍 받으라고, 그리고 엄마가 준 옷 선물도 잘 받고 떠나니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라는 것처럼 다 기다려주시고 저녁에 떠나셔서 하루 꽉 채운 짧은 장례였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을 헤아리던 그 마음의 깊이는 감히 짐작조차 못 하겠다. 아마 떠난 뒤 여지껏 내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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